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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멸망 징후 재현|한남규 워싱턴특파원 현장진단1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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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미국에 귀화한 영국태생의 언론인 「앨리스테어·쿠크」가 미국사에 관한 BBC방송의 미국독립2백주년 기념 장기 다큐멘터리를 끝내면서 한가지 결론을 내렸다. 18세기 영국의 사가 「에드워드·기본」이 로마제국멸망의 전조로 주장한 징후의 몇 가지가 미국에도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허식과 사치의 끝없는 추구, 벌어지는 빈부격차, 섹스의 범람, 창조성을 자처하는 광란, 속악과 폭력에 대한 도덕적 마비 등.
제일 부강했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존경을 받고 동시에 미움까지 받던 미국의 모습이 바뀌고 있다. 폭력·마약 등 세계최고의 범죄율, 일류대학을 나와 컴퓨터를 두드리면서 글을 쓰지 못하고 계산에 어두운 학력저하, 높은 영아사망률과 확산되는 AIDS, 늘어나는 미혼모와 이혼율, 그리고 생산성의 급락 등.
작년 6월 워싱턴의 우드로윌슨센터가 주최한 세미나에서 전 콜로라도주지사 「리처드·램」 다트머드대 교수는 황폐해 가는 미국의 사회현상을 통렬히 개탄했다.

<범죄율 세계 최고>
국민학교 입학 때 벌써 일본·대만학생보다 기초지식에서 뒤진 미국학생은 17세가 되면 수학실력이 스웨덴학생의 절반수준이며 고교졸업식 때 받은 졸업장을 못 읽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미국인구의 절반밖에 안되는 일본이 더 많은 엔지니어를 길러내는 동안 미국은 변호사를 양산, 한해 배출되는 변호사가 일본전체 변호사의 3배에 이르러 비생산적인 송사가 범람한다고 말했다.
미국에 범죄가 많다는 것은 새로운게 아니다. 하지만 연간 1천명 당 2백18명이 도난을 당한다. 서독은 33명, 일본이 2명꼴이다. 살인이 일본의 5배, 강간은 10배. 교도소가 모자라 뉴욕시는 선박활용을 구상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아동의 14%가 미혼모에게서 태어나며 40%의 자녀들이 18세에 이르기 전 부모의 이혼을 경험한다. 영아사망률이 쿠바·스페인·그리스보다 높다.
집 없는 부랑자가 점점 늘어나 추운 겨울밤 백악관 길 건너 라파이에트 공원 벤치에서까지 잠을 자는 이가 있다. 상당수의 마약중독자가 포함된 이들의 숫자가 전국적으로 3백만명에 이른다고 언론은 추계하고 있다.
국가의 부가 제품 및 서비스생산능력에 달려있다는 점에 비추어 미국인의 생산성 저하는 더욱 심각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국제경쟁력에 관한 문제다.
지난 6월 「산업경쟁력평의회」라는 명칭의 한 워싱턴 민간단체가 「경쟁력 지표」라는 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단체의 회장은 컴퓨터회사인 휼릿 패커드사의 「존·영」사장이며 조사·분석은 「마이클·포터」하버드대 교수가 책임을 맡았다.
72년을 1백으로 볼 때 86년의 미생산성은 68·7로 떨어졌다.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생산성 증가율이 서독의 3분의1, 일본의 8분의1, 소위 경제선진국 평균의 4분의1 수준이다. 생산성증가율의 낙후속도가 매우 빠르다. 작년만 해도 서독의 절반, 일본의 4분의1이었다.
이 같은 물질적 퇴조는 국민정신자세의 퇴조에서 연유된다는 자생이 크게 대두되고 있다. 소외·불신·냉소·개인주의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사학자이며 문명비평저술로 이름난 「바버라·터크먼」은 미국퇴조의 원인을 윤리의 붕괴와 정부의 무능력에서 찾고있다.
지난 3월 이라크 전투기의엑조세미사일의 공격을 받아 30여명의 승무원이 사망했던 스타크호 사고당시 선장은 브리지에 나와있지도 않았고 대미사일 방어장비는 작동되지 않았으며 경고를 받고도 적기에 대한 공격태세마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1756년 프랑스가 영국의 미노르카섬을 공격했을 때 영국해군이 장비·인력이 허술한 함대를 방어에 투입, 결과적으로 섬을 빼앗겼다하여 「존·빙」 해군제독이 사형을 당했다는 사실을 회고시킨 「터크먼」은 미해군은 이 사건의 경우 군법회의 회부조차 하지 않았다고 기율의 해이를 개탄했다. 미국정부는 국민기강확립과 국가목표달성에 필요한 국민희생을 요구할 능력을 상실한 것 같다는 것이다.
오히려 공직자의 부패·스캔들·위선 등 윤리의 마비현상이 끊이지 않고 노출되고 있다. 대이란 무기판매금지를 위해 외교압력을 넘어 위성감시망까지 동원했던 미국정부 스스로는 백악관 안보담당특별보좌관이라는 공식사절을 파견하여 무기판매를 뒷거래함으로써 대외적인 표리부동을 노출하고 국가신뢰도를 떨어뜨렸다.

<부랑자 3백만명>
대통령직속기구 국가안보회의는 애국심의 이름으로 무기수출통제법 등을 무시해가며 니카라과반군에 자금을 지원했다.
시민의 비판의식도 마비상태 같은 인상이다. 대이란 무기판매와 니카라과반군지원 실무책 「올리버·노스」 해병 중령은 오히려 많은 미국시민의 영웅으로 부상돼 대통령으로 내보내자는 구호까지 나오고 「올리」(애칭)티셔츠가 한때 유행하는 정도였다. 분개해야 할 때 분개할 줄 모르는 시민의 모습이라고 의식 있는 미국인들은 자탄한다.
행정부 내 사직최고책임자인 법무장관이 이권에 개입한 혐의로 뻔질나게 법정에 출두하다가 사임하는가 하면 대통령 후보 경선자인 목사가 섹스·스캔들을 연출하는 등 국가상층부 윤리의 혼탁상이 어느 해보다 심하다.
곧 물러날 「레이건」 대통령은 유권자들에게 미국의 아침이 도래하고 있다고 희망을 제시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미국의 석양」을 우려하고 있다.

<시민비판의식 마비>
작년과 올해 미학자·언론의주요 논제의 하나로 미쇠퇴론이 등장했다. 저술·세미나·논쟁이 활발하다. 책방 쇼윈도의 가장 눈에 잘 띄게 전시된 책들이 「쇠퇴」서적이고 「쇠퇴학파」(School of Decline)는 세미나·의회증언·언론인터뷰 등으로 바쁘다.
『미국은 하향세인가.』-이는 오랫동안 끊임없이 미국에 대해 던져져온 질문이다.
최근 유행처럼 소용돌이치고있는 쇠퇴론도 경박한 것으로 판정 내려진 미문명의 질의 또 다른 실증일 뿐인지, 아니면 진정코 심각한 병세의 진단인지 헤아려 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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