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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초반 글 쓰고 싶어 10년 직장에 사표를 던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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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장연진의 싱글맘 인생 레시피(1)

17년 차 싱글맘이자 프리랜서 작가. 10년간 경찰공무원으로 재직하고 30대 중반 대학원 문예창작과에 들어가 소설가의 꿈을 키웠다. 뜻하지 않게 이혼을 하게 돼 두 남매를 혼자 키우게 됐다. 싱글맘으로서의 책임감과 소설가의 꿈 사이에서 ‘흔들다리’를 건너듯 수시로 흔들렸지만, 그 시련을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 스스로 당당해졌고 보다 주체적이 됐다. 같은 처지에 있는, 말 못하고 아파하는 이들에게 경험을 나누고 위로가 되고 싶다. <편집자>

30대 초반, 10년간 몸담았던 직장 사표를 냈다. 뒤늦게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1년 전부터 결혼으로 중단한 학사 과정을 독학으로 밟던 중이었다. 경영학과에서 국문학과로 전공을 바꿔서였다.

30대 초반 글쓰기 위해 10년 직장 생활 청산   

글쓰기를 배우기 위해 대학원 입시 준비를 하게 되었다.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글쓰기를 배우기 위해 대학원 입시 준비를 하게 되었다.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드디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새로운 출발선에 서게 됐다는 설렘과 자칫 육아와 집안일에 치여 일상에 안주하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스스로에 대한 경계심이 갈마들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남의 손에서 자란 첫째를 뒷바라지하면서 퇴직한 지 1년 만에 독학사를 취득했을 때까지만 해도 전자의 감정이 우세했다. 하지만 글쓰기를 배우기 위해 대학원 입시 준비를 하면서 후자의 우려가 현실로 다가왔다.

영어 때문에 첫 시험에서 떨어지고 재수를 하는데 덜컥 둘째가 들어섰다. 워킹맘으로 사는 동안 영어와 담을 쌓고 살아서 대입을 준비하는 소그룹 고교생 틈바구니에 껴 기초를 다질 때였다. 큰애도 있는데 다시 애를 낳고 키우다가 영영 내가 가고자 하는 길에서 멀어지는 건 아닌가, 퇴직할 때의 두려움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7년 동안 워킹맘으로 살면서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직접 몸으로 느끼지 않았던가. 마치 운명이 바리케이드를 쳐 놓고 어디 넘어갈 테면 한번 넘어가 보라고 앞을 턱 막아서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곧 겸허한 마음으로 배 속의 아이가 내민, 그 보이지 않는 고사리손을 꼭 잡았다. 의지만 확고하면 육아와 학업을 얼마든지 아우를 수 있다고 자신을 다독이며 말이다.

그런데 둘째를 가진 줄 모르고 구충제를 먹은 게 생각나 담당 의사와 상의했더니 냉정하게 생각을 하라는 게 아닌가! 다 내 불찰인데 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배 속에 있는 아이에 대한 죄책감에 진료실을 나오는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제 자식이 생겼는데 반가워하기보다 늦게 찾은 꿈이 꺾이지나 않을까 걱정했던 나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아이를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수소문한 다른 지역 산부인과 전문병원에 다시 진료를 요청했다. 여러 산전 검사 끝에 그 병원 의사가 희망을 심어줬다. 기형아를 출산하는 요인이 수없이 많은데 약 한 알 때문에 귀한 생명을 지울 수는 없지 않으냐며, 건강하게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같이 노력하자고 했다.

멀고도 먼 대학원 가는 길 

태교에 전념하는 와중에도 대학원 시험은 거르지 않았다. [사진 연합뉴스]

태교에 전념하는 와중에도 대학원 시험은 거르지 않았다. [사진 연합뉴스]

덴가슴에 무조건 안정을 취하고 태교에 전념하기로 했다. 책을 완전히 손에서 놓으면 불안해 하루에 몇장이라도 책장을 넘기면 만족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대학원 시험은 거르지 않았다. 긴 스카프로 나온 배를 가린 채 두 번째 필기와 면접시험을 다 치렀다.

첫 시험 때도 그랬지만, 영어가 부족한데도 시험을 계속 보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 퇴직할 때의 그 심장 뛰는 소리를 한 번씩 다시 듣고 싶었다. 면접에서 학부 출신이 아닌 불리함을 만회하려면 자꾸 도전해서 내 의지를 확실히 보여주는 게 유리할 듯싶었다.

지금의 은사님이신 면접관 선생님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대학원에 진학하는 새파란 지원자들과 경쟁하는 내가 안타까운지 야간 대학원에 지원하면 바로 붙여 주겠다고 농담 겸 ‘회유’를 했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야간대학을 다녀 온전한 대학생활을 하지 못했던 나는 더 준비해서 꼭 주간으로 다닐 거라고 의지를 불태웠다.

둘째 낳자 배움의 열망이 고개  

구충제 때문에 마음 한구석이 늘 찜찜했는데 다행히 건강한 아이를 낳았다. 그러자 이제나저제나 눈치만 살피던 그 배움의 열망이 슬슬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산후조리가 끝날 무렵엔 이렇게 어영부영하다가 정말 내 길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예의 불안감이 다시 도질 정도였다.

하지만 아이를 떠나보낼 뻔했던 아픔을 애써 떠올리며 마음을 다스렸다. 어렵게 얻은 아인데 제대로 애착 관계를 형성한 뒤 남의 손에 맡겨도 늦지 않다고 여유를 부렸다. 대신 나중에 둘째를 떼놓고 학교 다닐 때를 대비해 집을 아예 대학원 근처로 옮겼다.

마침내 돌잔치를 치른 후 육아도우미를 구했지만, 육아의 굴레는 또 나를 시험에 들게 했다. 아이가 좀처럼 떨어지려고 하질 않아 매일같이 진땀을 빼야 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되뇌며 술래잡기 놀이를 하다가 몰래 집을 빠져나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엄마!” 소리치며 자지러지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독서실서 삼수 끝에 대학원 합격

대학원 합격통지서를 받던 날, 새로운 운명을 발급받은 기분이 동시에 들었다. [일러스트=김회룡]

대학원 합격통지서를 받던 날, 새로운 운명을 발급받은 기분이 동시에 들었다. [일러스트=김회룡]

근처 독서실에 앉아 책을 펼칠 때면 그 소리가 환풍기처럼 귓가에 윙윙거려 한동안 마음을 잡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삼수에 성공해서 합격통지서를 받던 날, 나는 정말이지 두 개의 통지서를 받아든 기분이었다. 하나는 대학원이, 다른 하나는 내 운명이 발급한.

장연진 프리랜서 작가 novljyj@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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