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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연의 예의 있는 저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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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동호 기자 중앙일보
김동호 논설위원

김동호 논설위원

“오래 전부터 감사할 줄 알고 물러날 때를 아는 공직자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간직해 왔습니다. (중략) 이제 자유인으로 돌아가 제 인생의 새로운 장을 열고자 합니다.”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4년 전 국무조정실장에서 물러날 때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다. 이 글처럼 그는 자리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다. 당시 그는 먼저 사의를 밝혔다. 이런 자세는 그가 국·과장 시절 거듭 한직으로 밀려났던 경험에서 비롯된듯 싶다. 조직에서 더 역할이 없고 자신을 안 쓰겠다면 순리로 받아들인다는 자세다. 다만 재임 중에는 최선을 다하고 필요하면 저항도 한다는 것이다.

경제 컨트롤타워 흔들려도 소신 펴며 자리 지켜 #끝내 정책 조율 힘들게 되면 저항마저 포기할듯

이런 인생관은 그가 아주대 총장을 물러날 때쯤 펴낸 『있는 자리 흩트리기』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1부 ‘예의 있는 저항’에서 “학생들에게도 ‘의견이 있으면 예의를 갖추고 당당하게 말하라’고 가르쳤다”고 했다. “더러워서 귀찮아서 피한다고 돌아서면 그 윗사람도 그 조직도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김동연은 말해야 하는 용기가 왜 중요한지 1997년 괌에서 발생한 대한항공 참사를 사례로 들었다. 사고 분석 결과 조종실 내 엄격한 서열 문화 때문에 즉각적으로 충분한 대화가 이뤄지지 않아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지난달 29일 가계소득 점검회의에서 김동연의 발언은 이런 지론대로였다. 그는 소득주도성장을 주도하고 있는 청와대 참모들이 “최저임금 인상의 충격은 확인된 바 없다”고 주장하자 강하게 소신을 피력했다. “가격(최저임금)을 올리면 수요(일자리)가 영향받는 것은 상식”이라는 취지의 주장이었다. 대통령 면전이지만 예의를 갖춰 당당하게 할 말을 했던 것이다.

그는 나아가 “고용과 소득에 단기 충격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인정하고 정책적인 보완 방안을 내면서 반대 목소리를 달래야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추진할 수 있다. 또다시 최저임금을 급격히 올리는 건 안 된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저소득층 소득 감소에 대해서도 “고소득 자영업자들이 저소득층 직원을 해고한 영향이다. 고소득층은 비용을 줄이면서 소득이 크게 올랐고, 저소득층은 일자리를 잃어 소득이 줄어든 것”이라고 발언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청와대 참모들은 물론 대선 캠프 출신 장관들 십수 명이 떼로 김동연의 주장을 반박했다. 궁지에 몰린 김동연이 정부를 떠나거나 낙마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됐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그의 당당한 저항을 존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1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1년이 지나도록 혁신성장에선 아직 뚜렷한 성과와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는 평가가 많다”며 김동연을 질책하는 듯한 발언을 했지만 “경제부총리를 중심으로 규제 혁파에도 더욱 속도를 내달라”고 주문했기 때문이다. 소득주도성장에 대한 이견은 덮어두되 대통령이 신임의 뜻을 밝힌 것이다.

이는 어제 김동연이 주재한 ‘소득분배 경제현안간담회’를 통해서도 확인됐다. 이 자리에는 소득주도성장의 컨트롤타워로 지목되기도 했던 장하성 정책실장이 빠지고, 홍장표 경제수석과 김수현 사회수석이 참석했다. 경제 컨트롤타워는 김동연이라는 점을 확인하는 모양새가 된 셈이다.

이런 구도는 그가 직을 던지느냐 남아서 저항하느냐의 갈림길에서 최대한 저항해 얻어낸 결과로 보인다. 소득주도성장에 대해서는 계속 속도조절론을 펴겠지만 이 정부에서 여전히 할 일이 있고 주군의 신임도 받았으니 오히려 롱런할 가능성이 커졌다고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문제는 소득주도성장·공정경제·혁신성장은 도저히 궁합이 안 맞는다는 점이다. 김동연은 "이들 세 정책을 조율해 나가겠다”고 거듭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는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예의 있는 저항도 부질 없어진다. 그렇게 되면 그는 저항을 포기하고 직을 내려놓을지 모른다. 이는 소득주도성장 실험의 실패를 의미한다. 그런 순간이 오지 않기만 바란다.

김동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