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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논설위원이 간다

유럽 럭셔리 브랜드가 살아남는 방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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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보리밭이었던 자리에 지은 맥켈란의 새 증류소. 주변 경관을 해치지 않기 위해 지붕에 잔디를 깔았다. [사진 맥켈란]

보리밭이었던 자리에 지은 맥켈란의 새 증류소. 주변 경관을 해치지 않기 위해 지붕에 잔디를 깔았다. [사진 맥켈란]

기존 생산량(연 100만 박스, 1200만병)보다 30%쯤 늘어난 증류소 하나를 증설했을 뿐인데 스코틀랜드, 아니 세계 위스키시장이 들썩이고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스코틀랜드 관광산업의 판도를 바꿔놓을 것이라는 기대까지 나온다. 프랑스 보르도의 와이너리가 와인이 아니라 프랑스의 문화적 유산(헤리티지)으로 손님을 끌고,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이 쇠락한 스페인 공업도시 빌바오의 부활을 이끌었던 것처럼 말이다. 대표적인 싱글 몰트 스카치 위스키 생산지인 스코틀랜드 북동부 스페이사이드(스페이강 인근)에 자리한 생산량 3위 싱글 몰트 위스키 브랜드인 맥켈란 증류소도 살아남기 위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모기업 에드링턴이 1억4000만 파운드(2025억원)를 들여 3년 6개월만에 완공한 맥켈란의 새 증류소에 왜 이런 기대가 쏟아지는지 직접 가봤다.

6월 2일 일반 공개에 앞서 언론에 먼저 공개한 맥켈란의 새 증류소 오프닝 파티 현장. [사진 맥켈란]

6월 2일 일반 공개에 앞서 언론에 먼저 공개한 맥켈란의 새 증류소 오프닝 파티 현장. [사진 맥켈란]

"단언컨대 세계 어느 곳에도 없는 독특한 증류소입니다. "
지난 5월 25일 증류소 증설을 기념하는 떠들썩한 파티 현장에서 만난 스캇 맥크로스키 맥켈란 최고경영자(CEO)의 말엔 과장이 없었다. 히드로 공항 5번 터미널과 퐁피두 센터 등을 맡았던 영국의 유명 건축사무소 러저스 스터크 하버 파트너스는 맥켈란의 증류소 프로젝트를 맡아 전통적인 증류소 건축에서 벗어나 지금까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증류소 건축을 선보였다.'랜드마크의 탄생'이라는 현지 언론의 표현대로 눈 앞에 펼쳐진 건물 외형은 압도적이었다. 120m 길이에 높이는 고작 18m인데도 '압도적'이라는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건 랜드마크의 통념과 정반대로 자연과 어우러져 오히려 전혀 눈에 띄지 않아서다.

스코틀랜드 고대 거석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낙타 등처럼 굽은 1만4000㎡ 넓이의 지붕은 잔디로 덮혀 미적 가치를 극대화하는 동시에 스페이사이드 주변 풍경을 해치지 않도록 설계됐다. 지붕 아래는 1800개 기둥을 비롯한 38만 개의 구성 요소가 서로 얽혀 있다. 오프닝 행사에 참석했던 매니페스토 건축사무소 안지용 대표는 "가장 복잡하면서도 가장 단순하고,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가장 눈에 띄지 않는 놀라운 건축"이라고 표현했다. 또 "공학과 예술을 훌륭하게 결합한 인상적인 건축물"이라고 덧붙였다.

발효조와 증류기가 한데 자리잡고 있는 맥켈란의 새 증류소. [사진 맥켈란]

발효조와 증류기가 한데 자리잡고 있는 맥켈란의 새 증류소. [사진 맥켈란]

21개의 발효조와 36개의 증류기가 원을 그리며 서 있는 내부 모습을 보면 공장이라기보다는 무슨 대형 설치미술 전시장 같다.
하지만 이 증류소가 주목받는 건 단지 건축 때문이 아니라 스코클랜드 위스키 산업이 가고자 하는 비전이 담겨 있어서다. 이 지역의 100개가 넘는 크고 작은 증류소 가운데 절반이 방문객 센터를 두고 여행객을 받는다. 나름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제공하지만 대부분 기존 생산시설을 보여주고 위스키를 판매하는 정도다. 반면 맥켈란은 여기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 처음부터 관람객 체험에 설비 못지않은 방점을 찍었다. 역사를 보여주는 위스키 아카이브 월을 갖추고 기존의 가이드 투어를 대폭 늘린 것은 물론 웬만한 대형 박물관처럼 9개의 다른 언어로 녹음된 설명기까지 구비했다. 당장 2017년 1만 7000원이었던 관광객을 2018년엔 두 배 이상 더 받을 생각이다. 이안 컬 에드링턴 CEO는 "수요 예측이 쉽지 않은 고급 싱글 몰트 위스키 시장을 감안할 때 최소 향후 12년(스카치 위스키로 인정받으려면 증류 후 3년만 숙성시키면 되지만 싱글 몰트 위스키는 최소 12년 숙성이 기본이다)을 내다본 증류소 증설을 리스크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절대 도박이 아니다"라며 "새 증류소는 관광산업과 수출, 더 크게는 스코틀랜드 경제에 도움을 주겠다는 우리 회사의 미래 비전과 야망을 담은 선언문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증류소 내부는 위스키 역사를 보여주는 아카이브 월이 설치되어 있다. 안혜리 기자

증류소 내부는 위스키 역사를 보여주는 아카이브 월이 설치되어 있다. 안혜리 기자

결코 허풍이 아니다. 이미 스코틀랜드의 많은 위스키 브랜드들이 이런 시도를 차근차근 해오고 있다. 단순히 위스키를 생산하는 걸 넘어 관광객 유치가 지닌 무한한 잠재력을 맨 처음 알아차린 건 생산량 1,2위를 다투는 글렌피딕이었다. 이 지역에서 가장 먼저 방문객 센터의 문을 연 것도 글렌피딕이다. 하지만 1824년 증류소 문을 연 맥켈란이 2014년 방문객 센터와 증류소를 일체화한 새로운 컨셉트의 증류소 착공에 먼저 들어가자 그 직후 글렌피딕도 서둘러 확장 공사를 시작했다. 조니 워커로 유명한 세계 1위 기업 디아지오도 최근 1억5000만 파운드를 들여 맥켈란과 비슷한 새 증류소를 짓겟다는 계획을 내놨다.

1824년부터 맥켈란의 심장부 역할을 해온 이스터 엘키스 하우스. 새 증류소 오프닝 파티에선 건물 외벽을 프로젝터를 쏘는 미디어 월로 활용했다. [사진 맥켈란]

1824년부터 맥켈란의 심장부 역할을 해온 이스터 엘키스 하우스. 새 증류소 오프닝 파티에선 건물 외벽을 프로젝터를 쏘는 미디어 월로 활용했다. [사진 맥켈란]

컬 CEO가 콕 집어 보르도나 빌바오를 언급하진 않았지만 지향점은 분명하다. 상품으로서의 위스키가 아니라 이젠 스코틀랜드 문화를 팔겠다는 의지 말이다. 프랑스 와인산업은 와인의 맛뿐 아니라 넓은 포도밭을 아우른 샤토(성)를 구경하는 보르도 와이너리 투어 덕분에 더욱 매력적으로 성장했고, 쇠락하던 빌바오는 1997년 건축계의 수퍼스타 프랭크 게리의 구겐하임 미술관을 유치한 후 지금은 상주인구의 4배 가량인 130만 명의 관광객을 매년 유치하고 있다. 단지 프랭크 게리 특유의 독특한 건축물 하나가 사람을 끌어들인 건 아니지만 구겐하임이라는 상징적 건축물이 들어섬으로써 제조업에만 기댔던 도시의 체질을 서비스업 중심으로 개선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제 스코틀랜드 위스키 산업도 이런 지점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쇠락하던 공업도시를 되살린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쇠락하던 공업도시를 되살린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스코틀랜드의 위스키 산업은 석유와 금융에 이어 세 번째로 큰 규모로, 스코틀랜드 경제활동 인구의 18%가 위스키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스코틀랜드 일자리 50개 중 1개는 어떤 형태로든 위스키와 관련돼 있다고 한다. 스카치 위스키는 1초에 40병씩 팔려 2017년 43억 6000만 파운드(6조5400억원)를 수출해 영국 전체 식음료 수출액의 5분의 1을 차지한다. 하지만 금융위기 이전과 같은 초고속 성장세는 꺾인 게 사실이다. 여전히 중국과 인도 등 신흥시장의 성장세가 가파르긴 해도 젊은 층을 중심으로 크래프트 비어(수제 맥주)나 럼 등 다른 주종은 물론 스카치 위스키로 인정을 못받는 40도 이하의 낮은 도수의 저렴한 위스키가 인기를 끌면서 성장에 발목이 잡혀서다. 한국만 해도 전체 스카치 위스키 수입액은 전성기 때인 2007년에 비해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스코틀랜드 지도. 북동쪽 흰 부분이 스페이사이드 지역이다.

스코틀랜드 지도. 북동쪽 흰 부분이 스페이사이드 지역이다.

결국 스코틀랜드 위스키업계가 찾은 해답은 이미 유럽의 다른 많은 도시가 성공적인 모델을 보여준 관광과의 결합이다. 스카치 위스키가 전반적인 위기를 겪는 것과 달리 하이엔드인 싱글 몰트 위스키 수요는 꾸준히 늘어 오히려 공급이 부족하다는 점, 이런 희소성 때문에 희귀한 싱글 몰트 제품의 경매가가 병당 수억 원에 달할 정도로 계속 신기록을 갱신하고 있다는 점도 이런 새로운 시도를 가능하게 했다. 스카치 위스키 가운데서도 프리미엄 제품인 싱글 몰트 위스키는 2016년 수출이 12% 늘어 사상 처음으로 10억 파운드(1조5000억원)를 돌파했고, 2017년 전 세계 싱글 몰트 위스키 판매량도 14.2% 늘었다. 술 자체보다 스코틀랜드의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한 장인의 예술공방이라는 럭셔리 상품을 파는 데에 팔을 걷어붙인 이유다. 실제로 싱글 몰트 위스키는 어느 증류소든 오로지 물과 보리, 효모라는 세 가지 재료로만 만든다. 이 세 재료의 품질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각 증류소마다 어떤 증류기와 어떤 캐스크(오크 통)를 쓰느냐, 그리고 누가 어떻게 블렌딩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맛을 낸다. 재료가 아니라 과정의 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이런 점이 증류소 투어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다. 실제로 스코틀랜드의 위스키 성지를 둘러보는 관련 패키지 상품을 내놓는 여행사가 점점 늘고 있고, 이런 관광 수요로 지난해 12개의 주요 증류소 방문객은 전년보다 15%나 늘어 44만명을 넘어섰다. 또 위스키 판매라는 선순환으로 이어진다.
위스키 뿐만 아니라 유럽의 럭셔리 기업들이 헤리티지만 내세워 장사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렇게 시대를 읽는 혁신을 끊임없이 하기에 계속 성장할 수 있었다. 맥켈란의 증류소 증설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다.

안혜리의 뉴스의 이면 #스코틀랜드 위스키 공장은 술 대신 매력을 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