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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는 지금 ⑥ 석유로 굴러가는 반미 연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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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1월 19일 브라질의 수도 브라질리아에서 만난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왼쪽), 아르헨티나의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대통령(가운데),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 이들은 베네수엘라산 천연가스를 남미로 수송하는 가스관을 공동 건설하기로 합의했다. [브라질리아 로이터=연합뉴스]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의 관문인 시몬 볼리바르 국제공항과 시내를 오가는 호텔택시 기사 미겔(35). 그는 핸들을 잡을 때마다 울화가 치민다. 공항 가는 길이 툭하면 주차장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거리는 35km지만 2시간 넘게 걸리는 건 보통이고, 어떤 때는 3~4시간도 걸린다. 공항과 수도를 잇는 교량이 올 1월 폭우로 주저앉은 탓이다. 출발 5시간 전에 호텔을 떠났지만 기자도 하마터면 비행기를 놓칠 뻔했다. "석유 팔아 번 돈으로 다른 나라 좋은 일만 시키고, 정작 베네수엘라는 이 모양"이라고 미겔은 투덜거렸다.

'프리메로, 베네수엘라(Primero, Venezuela)'. 11월 대선 출마를 선언한 훌리오 보르헤스 제1정의당 대표는 '베네수엘라, 우선'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우고 차베스 대통령의 '선심 외교'에 속이 터지는 유권자들의 불만을 파고드는 전략이다.

에드가르드 구티에레스 제1정의당 대변인은 "차베스가 지난 한 해 해외에 뿌린 돈만 164억6300만 달러에 달했다"며 "이 돈이면 새로 다리를 놓았어도 수백 개는 놓았을 것"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차베스가 집권하기 직전인 1998년 120억 달러였던 베네수엘라의 석유 수입은 고유가 덕에 지난해 360억 달러로 늘었다. 두둑해진 주머니를 풀어 차베스는 주변국에 선심 공세를 펼치고 있다. 중남미 13개국에 특별 할인가 석유 공급, 아르헨티나 국채 매입, 브라질 삼바 축제 지원, 멕시코 빈민층에 무료 개안수술…. 차베스의 선물 보따리에는 바닥이 안 보인다.

베네수엘라 최대 일간지인 '울티마스 노티시아스'의 엘레아사르 디아스 편집인은 "유가가 배럴당 30달러대로 올라간 2004년부터 차베스의 원조 외교가 본격화됐다"며 "그때부터 반미(反美)노선이 노골화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고유가로 벌어들인 달러로 선심 외교를 통한 중남미 반미 연대 구축에 나섰다는 것이다. 중국과 인도가 석유시장의 큰손으로 등장함으로써 고유가는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차베스의 판단이다.

브라질의 저명 언론인인 카를로스 사르덴버그는 "중남미의 뿌리 깊은 반미감정을 차베스가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지만 빈 수레가 요란한 법"이라고 말했다. 걸핏하면 미국에 석유 공급을 끊겠다고 차베스가 협박하고 있지만 그럴 경우 피해를 보는 것은 베네수엘라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미국까지는 5~6일이면 닿는 유조선이 중국까지는 45~50일이 걸리는 데다 베네수엘라산 중질유를 처리할 수 있는 정유시설이 중국에는 없기 때문이다. 미국이 중남미의 자원을 필요로 하듯 중남미도 미국의 달러가 필요하다. 서로 등을 돌릴 수 없는 현실은 석유로 굴러가는 반미 연대의 한계다.

카라카스=배명복 논설위원 겸 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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