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은미의 '춘향' … 유럽을 홀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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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무용의 이단아'로 불리는 안은미(43)가 보여준 '춘향'에 유럽이 휘청거렸다. 동양적 신비주의를 기대했던 유럽인에게 그의 무대는 충격이었다. 7일 이탈리아 우디네에서 시작돼 영국 런던 피콕 극장에서 타오른 열기는 곧바로 벨기에와 네덜란드까지 번져나갔다. 보름에 걸친 이번 유럽 4개국 7개 도시 순회 공연은 세계음악극축제(World Music Theater Festival)의 초청으로 이루어졌다. 안은미는 작품을 만들고, 유럽 주최 측이 제작비.극장 대관.마케팅을 맡는 공동 제작 형식이다. 규모.기간.제작방식 등이 이제껏 해외로 진출한 한국 무용이 경험하지 못한 일이다. 그 현장을 2박3일 동행했다.

# 시간 불문, 국적 초월

14일 저녁 8시30분(현지시각) 벨기에 앤트워프. 300석 규모의 지하 소극장을 가득 채운 관객은 첫 장면부터 숨을 죽였다. 비록 뒷모습이지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남자 4명이 비스듬히 누운 채 긴 머리를 풀어헤친 전라의 순간은 강렬했다.

춘향은 16세 꽃띠가 아닌 불혹을 훌쩍 넘긴 노처녀. 춘향으로 분한 안은미는 내숭 가득한 정숙한 처녀로 행세하다 때론 윗옷을 훌렁 벗은 채 상체를 뒤틀며 자신의 욕망을 그대로 까발렸다. 이몽룡과 꽃미남 변학도의 동성애까지. 우리가 아는 '춘향전'은 뼈대만 남아 있었다.

춤의 스타일은 '빠른 건 더 빠르게, 느린 건 더 느리게'였다. 한국 전통 춤사위가 빨리 감기는 테이프 마냥 '휙휙' 돌아가는 순간도 있었고, 내면을 묘사할 땐 굼벵이처럼 움직였다. 소품으로 등장한 보자기는 치마.모자.배.망토로 변신을 거듭했다. 판소리와 국악 연주는 무용수들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서늘한 세련됨'으로 무대를 받쳤다.

1시간 30분의 공연이 끝난 밤 10시, 객석을 채웠던 관객은 우르르 1층 카페로 몰려갔다. "최고다!(great)"를 연발하기도 했고, "세상에 이런 게 있다니…"라며 눈물을 글썽이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한 중년 부부는 "한국적 정서가 이런 것이냐. 정신없고 혼란스럽다"며 고개를 흔들기도 했다. 한국에선 늘 말썽이 됐던 '가슴 드러냄'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무용단이 네덜란드행 버스에 몸을 실은 밤 11시에도 카페엔 60여 명이 남아 있었다.

# 남는 건 오직 몸뚱아리뿐

네덜란드 숙소에 도착한 시각은 15일 새벽 2시. 공연은 이날 저녁 8시30분 암스테르담 중심가의 1000석 규모 콘서트홀에서 열린다. 장비를 옮기고, 시설을 설치하고, 무대에 적응하는 모든 과정이 십 수시간 내에 이루어져야 한다. 아찔한 강행군이 이어졌다.

15일 공연엔 기립박수까지 터져나왔다. 아방가르드(전위예술)적인 현대 무용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일이다. 관객 스티븐 파스만은 "너무 다르다. 그런데 눈부시다. 특히 색감이 압권"이라고 흥분했다.

무엇 때문에 이토록 열광하고, 이처럼 논쟁이 일어나는 것일까. 세계음악극축제 로버트 반덴부스 예술감독은 "과거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게이샤의 추억'을 원하지 않았다. 아시아적 정서로 이처럼 모던하고 세련된 예술은 오직 안은미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적 무용가 애미요 그레꼬는 "안은미에겐 가짜가 없다"고 평했다. 무용평론가 김남수씨는 "유럽은 몸 자체로 정면승부하는 안은미의 자극을 원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앤트워프(벨기에).암스테르담(네덜란드)=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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