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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글로벌 줌업] 트럼프 믿지 못하는 유럽·중동, 푸틴에게 달려간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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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5호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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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오른쪽)이 지난 18일 러시아 남부 소치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나 꽃다발을 받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오른쪽)이 지난 18일 러시아 남부 소치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나 꽃다발을 받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4일 전격적으로 북미정상회담을 취소하고 동북아 정세를 다시 뒤흔들었다. 놀란 북한은 트럼프 발표 8시간 만에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 담화를 통해 회담 재개를 요청하는 상황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단호함과 힘을 새롭게 보여줬다는 평가다.

트럼프 ‘미국 제일주의’ 밀어붙여 #이란 핵합의 깨고 예루살렘 갈등 #메르켈·마크롱에 네타야후까지 #푸틴과 만나 지구촌 현안 협의 #미국의 국제사회 리더 위상 흔들

하지만 유럽에선 트럼프 대통령의 위상이 상당히 흔들리고 있다. 트럼프는 미국을 비롯한 5개 유엔안전보장이사국과 독일이 참여했던 이란 핵합의에서 지난 8일 탈퇴한다고 발표했다. 21일엔 마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이란에 대해 더욱 가혹한 세부 요구 사안을 내놨다. 이란의 핵 활동에 대해 제한이 아닌 동결을 요구했으며, 탄도미사일 개발과 시리아 등 주변국에 대한 개입도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 유럽은 이에 대해 기존 핵합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조치라며 반발하며 미국이 빠진 상태에서도 핵합의를 유지하려고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스라엘이 건국 70주년을 맞았던 지난 14일 미국이 주이스라엘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긴 것도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예루살렘은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의 공동 성지인 것은 물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정부가 모두 수도라고 주장한다. 트럼프의 미 대사관 예루살렘 이전 결정은 휴화산에 다시 용암을 흘린 것이나 다름없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가자지구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고 이스라엘은 실탄 사격으로 맞서면서 이 지역은 다시 중동의 ‘발화점’이 되고 있다. 이 때문에 트럼프는 국제문제의 중재자나 국제사회의 지도자가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만들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문제는 이에 대한 반발이 영국을 제외한 유럽 국가들의 러시아 접근이라는 국제 현상을 낳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과 영국이 외교적으로 사실상 ‘적국’으로 여기는 러시아에 미국의 나토(북대서양 조약기구) 동맹국 정상들이 경쟁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미국의 위상과 트럼프의 위신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주밖에 없다. 이는 이란핵합의 이탈과 주이스라엘 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 등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가 일방적인 행동을 하면서 생긴 두드러진 현상이다. 트럼프를 견제하고 국제질서를 안정시키려면 러시아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는 증거다. 러시아에게는 영국에 거주하던 전직 러시아 스파이에 대한 독살 미수 사건 등으로 더욱 강해졌던 국제적인 고립에서 탈출하는 절호의 기회가 되고 있다.

일본의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지난 23일 ‘유럽·중동이 푸틴을 만나다-대미불신, 러시아에 순풍’이라는 제목의 모스크바발 기사에서 이 현상을 지적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5월 외교 일정표를 보면 미국의 외교 실패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푸틴은 9일 수도 모스크바에서 제2차 세계대전 전승기념행사를 열면서 중동의 대표적인 친미국가인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의 참석이라는 외교적 개가를 올렸다. 17일에는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을 흑해 연안 휴양지로 겨울올림픽 개최지인 소치에서 만났다. 바로 다음날인 18일엔 같은 장소에서 독일의 앙겔라 마르켈 총리와 만나 정상회담을 했다. 푸틴은 메르켈에게 꽃을 선물하기도 했다. 21일에는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소치를 찾았다. 22일에는 불가리아의 루멘 라데프 대통령이 같은 곳을 찾았다. 엿새 동안 4명의 국가원수를 맞은 소치는 글로벌 외교 중심지가 됐다. 푸틴은 24일엔 장소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 엠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을 만났다. 26일에는 모스크바에서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와 정상회담을 한다.

우선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푸틴과 회담하면서 이란핵합의 유지 문제는 물론 러시아가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시리아와 우크라이나 문제까지 협의했다. 이 회담에서 실질적인 ‘유럽의 맹주’ 메르켈은 “유럽연합(EU) 및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러시아와의 대화를 지지한다”라고 밝혔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24일 푸틴을 만나 시리아 평화 프로세스에 협력을 의논했다. 미국과 유럽은 알아사드 정권을 퇴진을 요구해왔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시리아에서 미군을 완전히 철수할 뜻도 내비쳐 유럽은 미국을 믿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미 프랑스 등에선 “현실이 이러니 알아사드 정권의 존속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실정이다. 마크롱이 푸틴을 찾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독일과 프랑스는 올해초 영국에서 독살미수사건이 발생하자 영국 및 미국과 협조해 대러시아 제재를 가동했다. 그뿐만 아니라 프랑스는 러시아가 뒤에서 방패 노릇을하는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 정권이 반군을 대상으로 국제적으로 금지하는 화학무기를 사용한 것으로 단정해 미국, 영국과 손잡고 군사공격까지 단행했다. 이런 상황은 트럼프의 잇따른 돌출 행동으로 급하게 변하고 있다.

나토 회원국인 터키는 시리아의 쿠르드족 세력을 누르기 위해 이들을 지원하는 미국보다 알아사드를 후원하는 러시아에 오히려 접근하고 있다. 미국 동맹군인 터키와 사우디아라비아는 러시아판 사드로 알려진 대공무기체계 S-400을 사기까지 했다.

유럽과 중동 지역 미 동맹국들의 러시아에 대한 태도가 극적인 전환시대를 맞고 있는 셈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이란핵합의 이탈과 예루살렘 문제로 갈등을 일으키는 사이 러시아는 줄곧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을 강조해왔다. 주먹을 휘두르는 트럼프와 말로 하자는 푸틴 사이에서 고민이 깊어가던 유럽 정상들은 푸틴과의 활발한 접촉으로 새로운 해결책을 모색하도록 이끌었다. 트럼프의 ‘미국 제일주의’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불신감이 유럽을 대러시아 독자외교로 나아가게 한 셈이다. 트럼프 스스로 국제사회 지도자의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난 것이나 진배없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질서를 주도해온 미국의 위상을 결정적으로 흔드는 계기가 되고 있다. 미국과 트럼프 대통령의 불행이자 유럽과 중동 국가들의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이는 한반도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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