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英도 반했다…구르카족 용맹, 북미회담 경호 맡게 된 사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채인택의 글로벌 줌업’ 외 더 많은 상품도 함께 구독해보세요.

도 함께 구독하시겠어요?

아시아안보회의 개막일인 6월 1일 싱가포르 샹그릴라 호텔에 방탄복을 착용하고 자동소총과 샷건을 든 무장경찰이 배치돼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뉴스1]

아시아안보회의 개막일인 6월 1일 싱가포르 샹그릴라 호텔에 방탄복을 착용하고 자동소총과 샷건을 든 무장경찰이 배치돼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뉴스1]

[채인택의 글로벌 줌업]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경비를 ‘식민지 유산’ 구르카족 경찰이 왜 맡나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북미정상회담 경호를 네팔 출신 구르카족 경찰 병력이 담당할 것이라고 로이터 통신이 최근 보도했다. 독립국가인 싱가포르 경찰에 왜 네팔 출신 외국인인 구르카족 경찰이 근무하는 것일까? 그것도 1800명이나 말이다.

인도식민지군 네팔 구르카족, 인도 독립하자 이동 배치 #싱가포르, 식민지 시절인 50년 무슬림-유럽계 종교 충돌 #말련 시절 64년 7~9월 무슬림-중국계 대규모 민족 폭동 #현지 경찰 진압하면 희생자 발생시 민족 갈등 증폭 #영국이 데려온 제3의 민족 구르카족이 성공 진압 #65년 독립 리콴유 초대총리, 완충병력 필요성 절감 #‘식민지 유산’ 구르카족 경찰부대 고정 배치해 활용 #다민족국가 싱가포르 숨은 고민 민족·종교 갈등 막아

과거 식민지 시절 홍콩을 방문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구르카족 부대를 사열하고 있다. 이 부대는 홍콩이 중국에 회귀되면서 영국으로 주둔지를 옮겼다. [중앙포토]

과거 식민지 시절 홍콩을 방문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구르카족 부대를 사열하고 있다. 이 부대는 홍콩이 중국에 회귀되면서 영국으로 주둔지를 옮겼다. [중앙포토]

1800명 병력의 ‘구르카 경찰단’ 별도 구성

구르카 분견대의 기본 임무는 특수 경비이며 최근 이들은 대테러 임무의 선두에 서고 있다. 이들 구르카족 부대는 1949년 인도에서 싱가포르로 이동했으며 1965년 싱가포르 독립 이후 계약에 의해 싱가포르 경찰에 ‘해외 취업’하고 있다. 싱가포르 경찰에는 ‘구르카 경찰단(Gurkha Contingent :GC, 辜加警察團)라는 이름의 구르카 분견대가 별도로 조직돼 있다. 이들은 고도의 특수 훈련을 받은 뒤 헌신성과 업무 적합성이 확인될 때 정식 임용돼 임무에 투입된다.

6·12 북미정상회담 장소로 결정된 싱가포르 센토사섬 내 카펠라 호텔 입구, [뉴스1]

6·12 북미정상회담 장소로 결정된 싱가포르 센토사섬 내 카펠라 호텔 입구, [뉴스1]

구르카족, 200년 전 영국 식민지 군대 근무  

구르카족은 200년 전부터 영국과 옛 영국 식민지 국가 등에서 군사와 경찰 업무에 종사해왔다. 현재도 영국군과 인도군에 구르카 부대가 있으며 브루나이도 왕실 경호를 구르카족에게 맡긴다. 여기에는 역사적인 사연이 있다. 네팔의 한 부족인 구르카족은 1814~1816년 벌어졌던 영국-네팔 전쟁에서 용맹성과 탁월한 전투 능력을 보여줬다. 네팔은 당시 고르카(지금도 인도에선 고르카로 부른다) 왕국이라는 이름의 독립국가였는데 이 때문에 구르카라는 부족의 이름이 곧 네팔을 의미한다는 주장도 있다. 전쟁 당시 구르카족을 눈여겨본 영국군은 이들을 적으로 두기보다 아군으로 포섭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해 구르카족 부대를 조직해 식민지 군대였던 ‘영국인도군’에 배치했다. 급여를 지급하는 직업군인 부대이다.

구르카족을 상징하는 전통 단검인 쿠크리. 1,2차 대전 당시 서유럽 전선에 배치된 구르카족 병사들은 야간에 적진에 침투해 쿠크리로 경계 근무를 서다 졸고 있던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의 목을 베어온 것으로 유명하다. [위키피디아]

구르카족을 상징하는 전통 단검인 쿠크리. 1,2차 대전 당시 서유럽 전선에 배치된 구르카족 병사들은 야간에 적진에 침투해 쿠크리로 경계 근무를 서다 졸고 있던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의 목을 베어온 것으로 유명하다. [위키피디아]

인도 독립으로 말레이·싱가포르 이동

1947년 8월 15일 인도가 독립하면서 영국인도군은 해체되게 됐다. 인도인도, 영국인도 아닌 네팔 출신으로 구성된 구르카족 부대원들의 운명도 새롭게 결정될 수밖에 없었다. 식민지 군대에서 근무하는 것을 부족의 주요 수입원으로 삼고 있던 구르카 족으로선 자신들의 군인 지위를 유지하는 것은 당대는 물론 후손들까지 먹고사는 데 절실한 문제였다. 1949년 4월 9월 영국-인도-네팔 삼각 합의가 이뤄지면서 구르카족 군인들은 본인의 희망에 따라 인도 또는 영국을 선택해 군 생활을 계속할 수 있게 됐다. 계속 구르카족에서 새로운 병력을 보충하는 석도 가능하게 됐다. 그 결과 10개의 구르카족 연대 중 6개가 인도군으로 가고 4개가 영국군 소속이 됐다.

영국 런던의 국방부 앞에 서 있는 구르카족 병사의 동상. '용감한 병사 중에 가장 용맹한 군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전통 단검인 쿠크리를 2개 겹쳐 놓은 구르카족 상징물이 보인다. [위키피디아]

영국 런던의 국방부 앞에 서 있는 구르카족 병사의 동상. '용감한 병사 중에 가장 용맹한 군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전통 단검인 쿠크리를 2개 겹쳐 놓은 구르카족 상징물이 보인다. [위키피디아]

영국군·인도군 아직도 구르카 분대 운용

영국인도군의 구르카 부대 중 4개 연대는 1948년 1월 1일자로 영국군에 배속돼 말레이와 싱가포르에 배치됐다. 이들은 이후 홍콩을 거쳐 영국으로 이동해 현재 영국군 구르카 여단을 이루고 있다. 지금도 약 3500명이 구르카 병사가 영국군에서 근무한다.
현재 인도군은 7개 구르카 연대에서 39개 대대를 운영한다. 이 가운데 6개 연대는 독립 직후 식민지 군대였던 ‘영국인도군’에서 넘어온 부대이며 1개 연대는 독립 이후 신설됐다. 독립 후 구르카 연대를 추가로 설치한 것은 그만큼 구르카의 전력이 인도군에 필요하다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인도군 소속 구르카족 병사들의 훈련 모습. [위키피디아]

인도군 소속 구르카족 병사들의 훈련 모습. [위키피디아]

싱가포르 경찰이 싱가포르인도 아닌 네팔의 부족 구르카족으로 이뤄진 ‘구르카 경찰단’을 구성한 계기는 바로 이러한 인도의 독립과 구르카족 부대의 전환 배치였다. 1949년 4월 9월 영국-인도-네팔 삼각 합의가 맺어지면서 영국군으로 구르카족 4개 연대 병력은 인도를 떠나 말레이나 싱가포르 등 아직 영국 식민지였던 다른 지역으로 전환 배치됐다. 반대로 인도 독립에 따라 그전까지 영국 식민지였던 말레이와 싱가포르에 주둔했던 시크족 부대는 영국군에서 분리돼 인도군으로 소속을 바꾸고 본국으로 귀국하게 됐다. 이 구르카족 부대는 말레이와 싱가포르에서 시크족 부대가 맡고 있던 군대와 경찰 임무를 맡았다.

종교·민족 갈등 싱가포르에서 완충 역할  

1950년 싱가포르에서 벌어진 종교 갈등 당시 시위 장면.[위키피디아].

1950년 싱가포르에서 벌어진 종교 갈등 당시 시위 장면.[위키피디아].

특히 싱가포르 식민지 경찰에 배치된 구르카인들은 치안 유지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들이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것은 영국 식민지 시절인 1950년 12월 11~13일 싱가포르에선 ‘마리아 허토흐 폭동’이 발생했을 당시다. 이 폭동은 싱가포르 법정이 체 아미나 빈트 모하마드라는 이름으로 말레이계 무슬림 가정에서 키운 13세 소녀를 생물학적인 부모인 네덜란드계 가톨릭교도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판결하면서 벌어졌다. 무슬림들이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는데 이 어린이가 성모마리아상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사진이 공개되면서 시위는 폭동으로 번졌다. 18명이 사망하고 173명이 부상했다. 구르카족의 용감하고 합리적이며 헌신적인 대처 덕분에 사태는 더는 확산하지 않고 진정됐다.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 싱가포르에서 유럽계 기독교도도 아니고 말레이계 무슬림도 아닌 구르카족 경찰의 존재가 돋보인 점도 있다.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와 연방을 형성하고 있던 1964년 대규모 민족 폭동이 터지면서 다문화사회 싱가포르에서 제3자의 입장인 구르카족 경찰의 존재 필요성을 톡톡히 보여줬다. 그해  7월 21일 이슬람 예언자인 무함마드의 생일을 맞아 싱가포르 전역에서 무슬림인 말레이계와 중국계가 감정적으로 충돌했다. 이 충돌은 그 해 9월까지 간헐적으로 계속됐다. 영국이 떠난 이후 서로 다른 종족 간에 민족 분쟁과 종교 갈등이 줄을 이은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계든 말레이계든 어느 한쪽에 속한 경찰이 나서면 사태가 더욱 악화할 수 있었다. 자칫 한쪽 편을 든다는 오해를 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해당 경찰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속한 종족의 눈 때문에 합리적인 일 처리가 어려워지는 문제도 있다.
시위 도중 자칫 ‘말레이계 경찰이 중국계 시위대에 발포했다’ ‘중국계 경찰이 말레이계 시위대에 총을 쏘았다’는 소문이 퍼지면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중립적일 수 있는 제3의 종족인 구르카족 경찰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졌다. 싱가포르 초대 총리 리콴유(李光耀, 1923~2015)는 구르카족의 규율 및 충성심과 함께 이런 요소를 고려해 싱가포르 경찰에 구르카족 분견대를 설치했다. 이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싱가포르 경찰 휘장.

싱가포르 경찰 휘장.

45세까지 근무 뒤 본국 귀국 의무

구르카족은 통상 18~19세 때 엄격한 체력 검증 등의 과정을 거쳐 선발돼 싱가포르에서 훈련을 받고 임용된 다음 급여를 받고 45세까지 근무하게 된다. 근무가 끝나면 본국 네팔로 의무 귀국해 연금으로 안락한 노후를 보내게 된다. 근무 기간이 끝난 뒤 싱가포르 정착이나 근무 중 싱가포르 국적 여성과 결혼은 할 수 없다. 이들은 근무 기간 중 싱가포르에서 마련해준 숙소에서 집단생활을 한다. 숙소에선 오후 10시 30분에 잠자리에 들어야 하며 자정 이후에는 외부 통행이 금지된다.

인구 560만에 경찰·군인 11만인 제복의 나라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 싱가포르는 제복의 나라다. 군인과 경찰의 비율이 높다. 싱가포르는 서울 면적(606.2㎢)의 1.2배인 721.5㎢의 좁은 국토에 561만 명(2017년 11월 싱가포르 통계청)이 몰려 사는 작은 도시국가이다. 그런데도 이 나라의 안보를 책임지는 싱가포르군은 7만1600명의 병력을 유지한다. 인구의 1.27%가 군인이다. 군 병력의 80% 정도가 징집병이다. 18세 이상의 모든 싱가포르 남자는 의무적으로 22~24개월간 군 복무를 해야 한다.
작은 섬나라 싱가포르의 법과 질서를 책임지는 경찰은 공식명칭이 ‘싱가포르 경찰부대(The Singapore Police Force: SPF, 新加坡警察部隊)’다. 병력이 4만2000명 수준이다. 군 병력의 절반을 넘는다. 이 가운데 1만5000명이 풀타임 경찰이다. 싱가포르 경찰의 모토는 ‘국가를 위한 경찰-싱가포르를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곳으로(A Force for the Nation–To Make Singapore the Safest Place in the World)이다.‘범죄를 예방하고 억제하며 탐지(prevent, deter and detect crime)’하는 것을 임무로 정하고 있다. 군인과 경찰을 합쳐 11만3000명 이상의 병력이 이 작은 도시국가를 지키는 셈이다. 미국과 북한이 싱가포르를 회담 장소로 선택하고 받아들인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 같은 철통 같은 보안도 한몫했을 것이다.

영국인도군의 구르카 부대 중 4개 연대는 1948년 1월 1일자로 영국군에 배속돼 말레이와 싱가포르에 배치됐다. 이들은 현재 영국군 구르카 여단을 이루고 있다. 말레이에 배치된 구르카 부대는 2차대전 당시 버마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벌였던 것처럼 정글 전투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4년 인도 동부의 임팔·코히마 지역에서 식민지 군대인 영국인도군 소속 구르카족 부대가 M3 리 전차와 함께 일본군 공격을 위해 전진하고 있다. [중앙포토]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4년 인도 동부의 임팔·코히마 지역에서 식민지 군대인 영국인도군 소속 구르카족 부대가 M3 리 전차와 함께 일본군 공격을 위해 전진하고 있다. [중앙포토]

브루나이엔 구르카 왕실경호대 2000명

1962년 12월에는 2개 구르카 연대가 영국 보호령이던 브루나이 술탄령에 일시 파견됐다. 왕실반대론자들이 말레이시아 연방 편입을 주장하며 봉기하자 진압에 나선 것이다. 당시 구르카의 놀라운 군기와 용맹성, 전투력에 감탄한 브루나이 술탄은 1974년 구르카 부대를 구성했다. 브루나이 내무부 소속의 보안부대다. 2000명 정도에 이르는 부대원 전원이 영국군 구르카 부대 전역자로 구성된 엘리트 호위부대다. 인구 41만 명에 군 병력 1만 명을 유지하는 브루나이가 2000명의 구르카 병력을 유지한다는 것은 그만큼 여기에 의존한다는 뜻이다. 브루나이의 구르카 부대는 무장과 훈련은 군대와 진배없지만, 임무는 민간 보안 업무에 더 가깝다. 브루나이의 군주인 술탄과 그 가족을 보호하는 게 주 임무다. 술탄의 직접 명령에 따라 브루나이 군과 함께 특수작전을 펼치기도 한다. 브루나이는 1984년 영국 보호령에서 독립국가가 됐다. 풍부한 석유 자원을 바탕으로 40여만 명의 인구가 1인당 국내총생산(GDP) 2만7000달러를 누린다.

1930년대 아프가니스탄에서 작전을 펼치는 식민지 영국인도군 소속 구르카족 부대원들. [위키피디아]

1930년대 아프가니스탄에서 작전을 펼치는 식민지 영국인도군 소속 구르카족 부대원들. [위키피디아]

1949년 싱가포르와 말레이에 배치된 영국군 소속 구르카족 부대는 단순한 경비 임무를 넘어 실전에 투입됐다. 1948년 당시 영국 식민지이던 말레이에서 ‘말라야 비상사태(Malayan Emergency)’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말라야 비상사태는 말레이 공산당 산하 무장단체인 말라야 민족해방군(MNLA)이 영국군을 대상으로 독립을 요구하면서 게릴라전을 벌인 사건이다. 1960년까지 계속된 이 사태로 말레이 지역은 혼란에 휩싸였다. 이 사태가 진행 중인 1957년 8월 31일 말레이 식민지는 믈라카 해협의 또 다른 영국 식민지인 페낭과 말라카를 합쳐 말라야 연방이란 국가로 독립했다. 말라야 연방은 1963년 싱가포르와 보르네오 섬의 북보르네오와 사라왁 등 인근 영국 식민지를 통합해 새롭게 말레이시아 연방을 구성했다. 싱가포르는 1965년 말레이시아에서 분리돼 중국계가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다민족 국가로 새 출발 했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