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대첩 때 첫 전술 도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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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제43회 광복절과 함께 개관 1주년을 맞은 독립기념관 측은 부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신용하)주최로 일제치하 당시 무장독립투쟁에 대한 국내 첫 학술심포지엄을 5일 오전 10시부터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장에서 갖는다.
이번 심포지엄은 항일독립운동의 여러 부분 중 그 동안 일반에게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던 무장투쟁을 주제로 한 첫 대규모 심포지엄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일제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려는 독립운동은 당시 여러 갈래로 이루어졌지만 치열한 항일의식을 토대로 가장 큰 역사적 과업을 실천한 것은 무장투쟁이었기 때문이다.
미리 배포된 주제발표내용을 간추려 본다.
「만주에서의 독립군형성과 초기 독립전쟁」을 발표한 박영석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은『만주지역은 한반도와 가깝고 한국인이 많이 살며 일본의 압력이 국내보다 덜 미친다는 점 등으로 독립운동기지로는 최적이었다』고 지적, 『이를 바탕으로 1911년 경학 사를 비롯, 무장투쟁주의를 지향하는 다수의 한국인단체들이 생겨나 군사훈련 등을 해 오다가 1919년 3·1 운동 직후부터는 대한독립단과 서로군정서·북로군정서 등 본격적 무장 독립단체들이 활발한 독립전쟁을 벌일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어「북로군정서와 김좌진의 항일무장투쟁」주제발표에서 신용하 서울대교수는『독립전쟁사상 가장 큰 승리였던 청산리대첩의 주역 북로군정서는 대종교계통과 공화 주의자인 신민회계통의 민족주의자들의 합작으로 설립돼 상해임정의 승인을 받은 정예부대였다고 밝히고 만주지형에 알 맞는 기습섬멸 전술 등 뛰어난 전술을 발휘했다고 말했다.
「1920년대 초 독립군단과 통합운동」주제 발표를 한 윤병석 인하대 교수는『청산리대첩 후 일본의 초토화작전으로 독립군은 경신참변이라는 시련을 겪었으나 1921년부터는 통합운동을 통한 조직정비가 이루어져 독립운동은 다시 활발히 전개되었다』고 밝혔다.
이어「조선혁명군과 양세봉의 항일무장투쟁」주제발표에서 김창순 북한연구소 이사장은『1929년 창립된 조선혁명 당은 사회주의적 색채가 강한 단체이지만 그 산하부대인 조선혁명군은 민족주의자인 양세봉이 총사령관으로 있어 독립투쟁과 반공투쟁을 병행했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한국 광복군의 조직과 활동」주제발표를 한 김창수 동국대교수는『1940년 중경에 정착한 임정은 광복군의 조직을 서둘러 40년9월 광복군을 창설했으나 당시 중국 정부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를 지녔다』고 지적했다.
한편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독립군 내부에 좌우대립이 노출되었던 1931년 이후의 무장독립투쟁에 대해서는 이념적 문제로 제약을 받아 온 국내연구상황을 반영, 거의 다루지 못했다.

<강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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