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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깁스해서""예민한 부위라도"···만졌지만 추행 아닌 판결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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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단원에게 상습적으로 성폭력을 가한 혐의로 기소된 연극연출가 이윤택씨. 사진은 3월 28일 경찰 출석 당시 모습. [연합뉴스]

극단 단원에게 상습적으로 성폭력을 가한 혐의로 기소된 연극연출가 이윤택씨. 사진은 3월 28일 경찰 출석 당시 모습. [연합뉴스]

"보는 관점에 따라 이윤택씨의 연극에 대한 열정이나 독특한 연기 지도 방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난 9일 연극연출가 이윤택씨의 첫 재판에서 변호인이 펼친 주장이다. 이씨는 여배우들을 시켜 자신을 만지게 하거나 여배우들의 민감한 신체 부위에 손을 댄 것에 대해 "정당하거나 잘못이 없다는 건 아니다"면서도 이는 "다른 단원들도 알고 있던 지도법"이라고 했다.

'만졌다'와 '안 만졌다'의 싸움이 아니라 이씨처럼 '만졌지만 그런 뜻이 아니었다'며 의도를 다투는 경우다. 이씨가 이런 전략을 택한 것은 불쾌한 신체접촉이 있더라도 '성적 의도'가 인정되지 않으면 강제추행죄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 법원이 '만졌지만 추행이 아니다'고 본 세 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간호사 엉덩이 만진 건 사실이나, 깁스 한 날 추행할 마음 들기 어려워"

사진은 본 기사와 관계없음. [중앙포토]

사진은 본 기사와 관계없음. [중앙포토]

A씨는 한쪽 손을 다쳐 병원 응급실에 왔다가 간호조무사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만진 혐의로 기소됐다. 당시 간호조무사가 이에 항의하자 "X발 X이, 어린 X이 싸가지가 없다"며 이번엔 손가락으로 배를 찔렀다는 내용도 공소장에 포함돼 있다.

A씨 사건을 맡은 청주지법은 "A씨가 피해자의 뒤에서 엉덩이를 1회 만지고, 손가락으로 배를 3회 찌른 사실은 인정된다"면서도 "강제추행의 고의가 없다"고 봤다. 빈태욱 판사는 "당일 수술 후 깁스를 한 A씨가 순간적으로 성추행할 마음이 생겨 피해자의 엉덩이를 만졌다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고 보고 지난 3월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응급실에는 피해자 외에 다른 간호사 한 명과 의사 한 명이 있었다. 재판부는 그 의사를 법정으로 불러 증언을 들었다. 의사는 "간호사 이름을 모르니 (A씨가) 물어보려고 하는데, 바빠서 대답을 못 하니까 손으로 이렇게 하는데 마침 그것이 엉덩이를 만지게 된 겁니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목격자도 강제추행의 고의가 없다고 했다"는 점을 고려했다.

피해 간호조무사는 법정에 나와 "엉덩이를 친 것보다 욕을 하며 배를 친 것이 더 화가 났다"고 했는데 이는 A씨에게 유리한 말이 됐다. 재판부는 "A씨가 배를 찌른 건 추행한 사실이 없다고 따지며 한 행동"이라면서 "일반인에게 성적 수치심에 혐오감을 일으키게 하고 선량한 도덕관념에 반하는 행위로 피해자의 성적 자유를 침해한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겨드랑이 안쪽 만졌어도…피해자가 의도를 예민하게 받아들인 것일 수도"

사진은 본 기사와 관계없음. [사진 연합뉴스TV]

사진은 본 기사와 관계없음. [사진 연합뉴스TV]

창원에 있는 한 공장에서 일하는 B씨는 동료 직원을 성추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동료 직원이 누군가를 찾는 것을 보고, 한 손으로 그녀가 찾는 사람을 가리키면서 다른 손을 그 동료의 겨드랑이에 집어넣었다는 혐의다.

피해 동료는 "B씨의 손이 왼쪽 겨드랑이 사이로 들어와 왼쪽 가슴 바로 옆을 만졌다"고 했다. 하지만 B씨는 "찾는 사람을 가리켜 주면서 그쪽으로 가 보라는 의미로 등이나 어깨를 친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난 2월 창원지법은 B씨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이병희 판사는 "피해 동료가 B씨로부터 기분 나쁜 신체적 접촉을 당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피해 동료의 말대로 B씨의 손이 겨드랑이 안쪽까지 닿았다고 해도…" 등 실제로 B씨가 예민한 부위를 만졌을 가능성에 무게를 실으면서도 그것이 죄가 될 수는 없다고 봤다.

이 판사는 "사건이 벌어진 장소는 공장 내 개방된 공간이고 주변에 근로자 여러 명이 있었고" "피해 동료는 B씨를 등지고 선 상태에서 B씨의 손이 닿은 부위와 느낌을 근거로 추행이라고 본 것" 등 당시 사정을 고려해 보면 "피해 동료가 당시 상황이나 B씨의 의도를 예민하게 받아들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종업원 다리 만진 사장님 "수저통에 수저 넣는 과정에서 다리를 치우기 위해 만진 것"  

한 음식점 내부 모습. 사진은 이 기사와 관계 없음. [중앙포토]

한 음식점 내부 모습. 사진은 이 기사와 관계 없음. [중앙포토]

충남 천안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C씨는 종업원의 다리를 만진 혐의로 기소됐다. 종업원이 설거지하고 있었는데 다가가 "스타킹 신었어? 다리 튼실하네"라고 말했고 종업원이 "안 신었는데요"라고 하자 손으로 종아리를 쓰다듬었다는 혐의다.

대전지법 천안지원은 "C씨가 종업원의 종아리 부분을 만진 사실은 인정된다"면서도 "성적 의도 없는 신체접촉일 수 있다"며 지난 1월 C씨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임지웅 판사는 판결문에 "설거지를 하고 있던 종업원의 다리 부분이 수저통을 가리고 있었는데, C씨는 수저통에 수저를 넣는 과정에서 종업원의 다리를 치우기 위해 손으로 종아리 부위를 접촉한 것으로 보인다"고 썼다.
또 "범행 장소인 주방과 홀 사이에는 문이 없고 주방 앞에 다른 종업원이 보고 있는데 그런 상황에서 강제로 추행할 의사가 있었다는 건 상당히 이례적이다"고 봤다.


성추행 이미지. [중앙포토]

성추행 이미지. [중앙포토]

김영미 변호사(한국여성변호사회 이사)는 "강제추행죄에서 피해자의 주관적인 부분도 판단하지만 객관적으로 '보통의 일반의 사람들이 느꼈을 때 추행으로 느낄만한 것인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누구라도 이런 일을 당했다면 수치심을 느낄만한 상황인지 여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지난 4월 "성추행·성희롱 소송을 심리할 때 법원은 2차 피해 우려 등 피해자의 입장에서 충분한 고려를 해야 한다"고 했다. 성희롱으로 교수직을 잃은 사람이 해임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낸 소송의 상고심이었는데, 대법원 1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그 해임이 정당하다면서 "피해자와 같은 처지에 있는 평균적인 사람의 입장에서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문현경 기자 moon.h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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