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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는 미네르바의 부엉새를 너무 일찍 날리지 말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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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4호 29면

‘판문점 회담은 평화쇼’라는 제1야당 대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17일 자유한국당 당사에서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미 측에 전달할 공개서한을 발표하고 있다. 여기엔 주한미군 감축·철수 거론 불가 등 7개 요구사항이 담겼다. [연합뉴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17일 자유한국당 당사에서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미 측에 전달할 공개서한을 발표하고 있다. 여기엔 주한미군 감축·철수 거론 불가 등 7개 요구사항이 담겼다. [연합뉴스]

영어 표현에 “너무 좋아서 사실로 믿어지지가 않는다”(too good to be true)라는 말이 있다. 평창과 판문점 이후 한국 사회에 넘치는 희열(euphoria),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잇단 김정은 위원장 칭찬,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대북 경제 지원 발언 같은 것이 여기 해당한다.

김정은 핵 내려놓는 담대한 조치 #돌아갈 다리 태우고 싱가포르로 #핵 포기한 북한 지원할 나라 많아 #홍 대표 상황 판단은 재래식 이해 #한반도 평화배당금 외면하지 말고 #당파적 정열 초월한 정치 지향하길

이런 분위기에 북한이 찬물을 끼얹었다. 북한은 16일 열릴 예정이던 남북 고위급 회담을 일방적으로 취소하고,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미국이 북한을 일방적으로 코너로 몰고 있다면서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이 유산될 수도 있다고 불길한 암시를 했다. 원인 제공자는 악명 높은 북한 붕괴론자 존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이다. 볼턴은 북·미 정상회담과 후속 실무급 회담에서 논의될 북한 핵·미사일 해체의 구체적인 방법을 선제적으로 공개해 버렸다. 자존심을 짓밟힌 북한의 반발은 예상된 것이다.

자존심 상해 반발한 북한, 판은 안 깰 것

북·미 정상회담이 취소되면 판문점 선언도 의미를 잃는다. 판문점과 싱가포르는 세트를 이루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회담은 판문점의 개념적 합의를 북·미 차원에서 크게 한 걸음 진전시키는 자리다.

북·미 정상회담이 무산되면 한반도 사태는 전쟁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작년보다 더 나쁜 상황으로 후퇴할 것이다. 그러나 조명균 통일부 장관의 말대로 판문점 정신과 북·미 대화 분위기에 본질적 변화는 없어 보인다. 한국은 한·미 연합훈련에 B-52를 전개하지 않겠다고 재빨리 북한에 통보했다. 김계관의 발언도 개인 성명의 형식이다. 판을 깨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그래도 남·북·미 정상들의 전화통화와 3각 특사 파견 등의 긴급 진화작전은 필요할 것이다. 특히 서훈-김영철, 서훈-폼페이오, 정의용-볼턴의 대면 또는 전화 조율이 중요하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는 2007년 3월 7일 조지 W 부시 정부의 이라크전쟁 수행방식을 비판하는 칼럼을 이렇게 끝맺었다. “오늘의 백악관이라면 테러와의 전쟁의 초기 단계를 훨씬 더 잘 다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의 영원한 비극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새는 어둠이 내려야 날개를 펴고 난다. 지혜는 고통을 겪고 실수를 하고 정열이 식고 관찰이 시작될 때 온다.”

브룩스는 2003년 이라크 전쟁 당시 부시 백악관의 분위기는 사명감과 맹목적 충성심과 애국심에 충만하여 객관적 정세의 정확한 판단 아래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음을 이런 말로 비판했다. 관찰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는 말이다. “인간이 사태를 충분히 이해는 것은 항상 때가 너무 늦었을 때라는 사실은 비극이다.” 그는 2003년 당시 도널드 럼즈펠드가 아닌 로버트 게이츠가 국방장관이었다면 이라크 전쟁을 제대로 치렀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군축담당 국무차관으로 리비아 핵 폐기를 주도하고 정부 밖에서는 대북 선제공격을 주장한 볼턴이 트럼프 정부의 안보정책을 지휘하는 자리에 있는 것은 이라크 전쟁 때 럼즈펠드가국방장관이었던 것만큼 불행하다. 볼턴이 바뀌든지 트럼프가 볼턴을 바꾸든지 해야 한다.

브룩스의 칼럼은 게오르크 헤겔(1770-1831) 역사철학의 패러디다. 헤겔은 1820년 『법철학 요강』이라는 저서에서 “미네르바의 부엉새는 어둠이 내려야 비로소 날개를 펴고 난다”고 썼다. 미네르바는 로마 신화의 지혜의 여신이다. 헤겔이 말하고자 한 것은 사건이 종결되기 전에는 사건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시작은 끝을 알려주지 않는다는 말과 통한다. 북·미 정상회담의 결과를 알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땅거미가 내릴 때를 기다려야 한다.

헤겔의 관점에서 보면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을 터닝 포인트로 한반도 전쟁위기가 화평 무드로 선회하는 데 대한 홍준표 자유한국당대표의 잇단 비판적 발언은 성급하다. 홍 대표의 부엉새는 황혼이 오기도 전에 날개를 펴고 있다.

북·미 회담 결과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평창에서 판문점과 평양을 거쳐 싱가포르로 이어지는 사태의 전개, 변화의 속도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어떤 기준을 들이대도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는 분명하다. 남한과는 비핵화를 이야기조차 하지 않겠다던 그가 4·27 판문점 선언에서 “남과 북은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데 합의했다. 내주에는 한국을 포함한 외국 기자들이 참관하는 가운데 풍계리 핵 실험장을 폭파·폐기한다.

홍준표 대표의 문제는 김정은의 이니셔티브를 재래식 이해(conventional understanding)의 틀로 해석하고 결론을 내리는 데 있다. 홍 대표는 성공적인 판문점 회담과 싱가포르 회담의 결과로 한국인들이 누릴 평화의 배당금을 외면한다. 인프라를 포함한 대북 투자, 국방예산 절감, 젊은이들의 군복무기간 단축, 한반도의 안정으로 격상될 코리아 프리미엄은 제1야당의 대표가 우선적으로 관심을 두어야 할 평화 배당금이다.

판문점 선언은 사실상의 남북 간의 종전선언을 담고 있다. 김정은은 2015년 30분 앞당겨 놓은 북한 표준시간을 되돌려 서울 시간에 맞췄다. 상징적인 의미가 큰 조치다. 40여일의 간격을 두고 두 번에 걸친 폼페이오 장관과의 회담을 통해서 김정은은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했을 뿐 아니라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대화 상대라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 폼페이오 방북 이후 김정은에 대한 트럼프의 말투가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었다.

폼페이오 장관은 13일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전향적인 말을 했다. “만약 북한이 조기 비핵화를 위한 담대한 조치를 취하면 미국은 북한이 한국 수준의 번영을 누리도록 노력할 용의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 담대한 조치를 취하는 문제를 오늘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논의했다.” 김정은은 이미 많은 담대한 조치들을 취하고 있다. 미국이 북한의 경제적 번영을 지원할 조건을 쌓아가고 있는 것이다.

김정은은 돌아갈 다리를 불태우고 트럼프를 만나러 간다. 김정은 체제를 지탱해 온 핵·경제 병진정책에서 핵을 내려놓았다. 4월 20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결정이 그것이다. 김정은으로서는 트럼프와의 회담의 실패를 용납할 여지(room)를 남기고 싶지 않다. 김정은과 트럼프가 싱가포르에서 비핵화를 넘어 한국전쟁의 종전 선언, 북·미 수교, 평화협정 체결에 관한 개념적인 합의를 한다고 해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김정은에게 두 번째로 절실한 것은 국제사회의 대규모 경제지원이다. 폼페이오 장관의 폭스 뉴스 발언은 비핵화에 대한 보상이 되는 경제지원의 선행 약속이다. 폼페이오는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미국 정부는 기업들의 대북투자를 허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기업들이 북한에 진출하면 일본, 싱가포르, 서유럽의 기업들의 대북 투자 러시가 예상된다. 마셜 플랜의 논의에 대해 한국이 부담을 다 진다고 걱정하는 소리가 요란하다. 유럽판 마셜 플랜 때는 미국 말고는 돈을 낼 나라가 없었다. 지금은 한반도 평화에 이해관계를 가진 부자 나라들이 많다.

보수 진영에서는 북한이 국가지도이념인 주체사상을 포기하지 않는 한 개혁과 개방을 추진할 수 없다고 말한다. 김정은은 주체사상을 비켜 가는 전략으로 딜레마를 극복하는 실용주의 정책을 쓸 수 있다. 장마당의 확산, 낮은 수준의 시장경제 채택, 과감한 외국자본 도입을 기정사실로 쌓아 가랑비에 옷 젖는 방식으로 주체사상에 물타기 할 수 있다.

남·북 손잡으면 한반도 게임의 룰 주도

지난달 27일 판문점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던 중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

지난달 27일 판문점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던 중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

북한 경제가 개방되면 북한은 중국 경제에 종속될 것이라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어제와 오늘을 혼동하는 오산이다. 북한이 국제적으로 완전히 고립되었을 때는 중국을 향한 대륙의 뒷문만 열려 있었다. 그러나 북한이 해양으로 문을 열면 중국도 한쪽으로 기울지 않은 평평한 운동장에서 해양 경제 라이벌들과 경쟁해야 한다.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어 남북한이 대외적으로 한목소리를 내면 한반도 문제에 관한 한 게임의 룰은 남북한이 정할 수 있다.

이 모두가 김정은과 트럼프 회담의 결과에 달렸다. 그 결과를 전망하는데 리버럴과 보수 진영의 견해가 갈릴 뿐이다. 판문점 선언은 여론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다. 평창에서 싱가포르 이후까지의 한반도 평화 만들기의 전체 흐름에 대한 여론의 낙관적인 기대도 높다. 홍준표 대표는 여론의 이런 추세를 외면하고 김정은의 변화 행보를 위장 평화공세로 몰고, 판문점 정상회담을 평화 쇼, 주사파 합의라고 폄하하고, 김정은이 한국의 다음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4월 21~22일자 중앙SUNDAY에 대동강변의 트럼프 타워를 기대한다는 칼럼을 썼더니 보수우익에서는 히스테리에 가까운 반발을 했다. 그러나 북·미 정상회담이 김정은과 트럼프가 희망하는 결과를 낳으면 대동강변의 트럼프 타워 정도가 아니라 평양 여명 거리에 맥도널드와 스타벅스가 들어선다고 한들 누가 놀라겠는가. 김정은은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로 비핵화 수순을 밟고 있다.

헤겔과 브룩스로 돌아가 다시 말하자면 홍준표 대표는 미네르바의 부엉새를 황혼이 되기 전에는 날리지 말아야 한다. ‘모래시계 검사’의 화려한 스펙을 가진 제1야당의 지도자라면 당파적 정열을 초월한 맑은 예지로 역사의 진행을 관찰하는 큰 정치가를 지향할 만하지 않은가.

김영희 전 중앙일보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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