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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차타고 밤10시 퇴근하는데, 우리가 사장이라뇨?"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직접 가보니...탠디보다 열악한 성수동 제화공들 

지난 17일 서울 성동구 성수동 수제화 공장 내 제화공이 구두를 만들고 있다. 여성국 기자

지난 17일 서울 성동구 성수동 수제화 공장 내 제화공이 구두를 만들고 있다. 여성국 기자

지난 17일 오후 서울 성동구 성수동 낡은 건물 2층 수제화 공장에 들어서니 강력 접착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탁탁탁' 작은 망치로 가죽 두드리는 소리, 재봉틀로 구두 가죽 깁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왔다. 침묵이 들어설 틈 없이 제화공들의 손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켤레당 공임 10년째 5500원, 앉은 채로 하루 12~16시간 일해 

"탠디보다 성수동이 더 열악해요. 구두 한 켤레 당 받는 공임은 5000~5500원인데 10년 전쯤과 똑같아요. 오전 6시쯤 도착해서 늦을 때는 밤 10시까지 일하고 그렇게 하루에 갑피(구두 밑창을 제외한 가죽 부분) 20개 정도 만들어요."

40년 차 제화공 김학배(57)씨가 바쁘게 가죽을 두드리며 말했다. 18살 때 충주에서 서울로 올라와 구두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김씨는 "이제는 직업을 바꿀 수도 없고 답답한 노릇이다"고 했다.

서울 관악구에 위치한 구두업체 탠디 소속 하청업체 제화공들은 지난 4월 26일부터 8년째 6500원으로 동결된 구두 공임 단가 인상을 요구하며 16일간 본관 점거 농성을 벌였다. 지난 11일 구두업체 탠디는 켤레당 공임 1300원을 인상, 정당한 사유 없는 일감 축소 금지 등을 제화공들과 합의했다. 이날 국내 최대 수제화 산업단지인 성수동 제화공 300여 명은 결의 대회를 열었다. 이들은 10~20년 공임이 동결된 성수동이 탠디보다 더 열악하다며 공임 단가 인상과 소사장제 개선을 요구했다.

성수역 인근의 성수수제화 거리. 여성국 기자

성수역 인근의 성수수제화 거리. 여성국 기자

6.25 전쟁 이후 미군 군화 수선을 계기로 번창한 서울 중구 염천교 제화업체들은 1970년대 이후 상대적으로 땅값이 저렴한 성수동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후 유명 브랜드 업체들이 모여들며 수제화 단지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47년째 제화 노동자로 일하는 이현수(61)씨는 "남대문 시장 근처 '워싱턴'이란 곳에 있다가 80년쯤 성수동으로 왔다. 이후 여러 업체가 모여 수제화 산업단지가 됐다"고 회상했다.

성동구청과 소상공인연구원이 낸 '2017년 성수동 수제화 산업체 실태조사'에 따르면 성수동에는 382개의 수제화 업체가 있다. 중소기업청 등은 국내 수제화 제조업체의 70% 이상이 성수동에 밀집한 것으로 추정한다. 실태조사에 따르면 이중 재화생산ㆍ판매 업체는 271개(70.94%), 원부자재유통 업체는 98개(25.65%), 종사자 수는 상용근로자 1428명(50.80%), 자영업자(도급자)는 1214명(43.19%)에 이른다. 자영업자들은 이른바 '소사장'으로 불리는 특수고용직이다.

과거 직접고용, 이제는 자영업자 '소사장'…"서로 '3.3%'라 불러"

 지난 17일 서울 성동구 성수동 수제화 공장 내 제화공이 구두를 만들고 있다. 여성국 기자

지난 17일 서울 성동구 성수동 수제화 공장 내 제화공이 구두를 만들고 있다. 여성국 기자

과거 제화공들은 구두업체와 근로계약을 맺고 직접 고용된 상태로 일했다. 2000년대 이후 이들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닌 자영업자인 '소사장'으로 분류됐다. 이씨는 "한 업체에서 갑자기 주민등록등본을 가져오라고 해 사업주가 사업자신고를 하면 '소사장'이 됐다. 성수동은 10년 전 대부분 그렇게 변했다"며 "이후로는 4대 보험, 퇴직금 등을 받을 수 없게 됐다"고 했다.

30년 넘게 일한 제화공 함모(58)씨는 "소사장인지 뭔지 법은 잘 모른다. 우리는 서로 '3.3%' 라고 부른다. 한 켤레당 5500원꼴로 하루 12~16시간 일해 하루 20개 내외 갑피를 만든다"고 말했다. 3.3%는 월급생활자가 아니라 사업소득자로 분류되는 자영업자들에게 원천 징수되는 사업소득세 비율이다. 일부 사업주들은 이 사업소득세를 직접 내주기도한다.

성수동 제화공들은 구두가 30만원 짜리든 15만원 짜리든 상관없이 공임 단가는 5500원 내외다. 저부라고 불리는 구두 밑창을 두드리던 40년 차 제화공 홍모(62)씨는 "공임은 5300원과 6000원 짜리가 있다. 8년째 같은 금액이다. 첫차를 타고 나와 밤 10시에 돌아간다"고 말했다. 민주노총 서울일반노조 제화지부 정기만(53) 지부장은 "열악한 근무여건으로 젊은 사람들은 제화공을 꺼린다. 성수동 제화공들은 대부분 20~40년 이상 경력을 가진 장인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30만원 짜리 구두 한 켤레의 경우 백화점은 10만원 넘게 가져가는데 제화공에게는 5500원이 떨어진다"며 "공임 단가를 높이면 적정 개수 구두를 만들고 품질도 더 신경 쓰게 돼 불량률도 낮출 수 있다"고 덧붙였다.

처우개선은 검토, 직접고용은 글쎄?…"제화공 처우 사회적 논의해야" 

 지난 17일 서울 성동구 성수동 수제화 공장 내 제화공이 구두를 만들고 있다. 여성국 기자

지난 17일 서울 성동구 성수동 수제화 공장 내 제화공이 구두를 만들고 있다. 여성국 기자

이러한 제화공들의 처지에 대해 한 수제화 하청업체 대표는 "한 명이 신발 전체를 만드는 게 아니라 미싱, 비즈 데코 등 분업화돼 있어 1인당 공임이 낮아 보이는 것"이라며 "전체 인건비로 따지면 결코 적지 않다"고 전했다. 탠디 측은 "소사장제에 관해서는 앞으로 논의할 예정이지만 장소, 인력관리 등 현실적으로 노동자 전원 직접 고용은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특수고용직, 소사장제 등 문제와 관련해 제화공들의 처우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도급계약 성격이 있지만 개별 근로자성이 문제 될 수 있는 부분도 있고 공임이 지나치게 낮은 부분은 소사장이라도 불공정 계약으로 볼 수도 있다"며 "시장의 공정성, 최저임금, 물가상승률 등을 고려해 공임산정의 합리적인 기준을 마련해 적정한 대가를 보장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이어 "제화업계 실태, 일자리 유지, 사업 안정화를 위한 최선의 방안이 무엇인지 제화공과 업체 등 이해관계자들의 참여와 소통을 통해 접점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첫차를 타고 나와 밤 10시에 들어가는 내가, 8년째 켤레당 5500원을 받는 내가 '사장'이 붙는 '소사장'인가. 우리끼리 부르는 대로 '3.3%' 일 뿐이다."
이렇게 말하는 40년 차 제화공 홍씨의 두꺼운 엄지손톱은 닳고 닳아있었다.

여성국·김지아 기자 yu.sungk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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