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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없는 군 "무력 무력화"통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계급없는 사회를 실현한다는 구실로 모택동시절 폐지됐던 중국군의 계급제 부활은 그동안 경제개혁의 그늘에 가려있던 군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노력중의 하나로 볼수있다.
등소평 체제가 굳혀진 이래 중국은 군장비의 현대화를 추진하면서 4백만명의 병력규모를 3백만명 수준으로 감축해 왔다.
그러나 경제개발에 대한중점투자와 병력감축은 중국군 내부의 사기에 상당한 영향을 주는 부작용을 빚어온 일면도 적지않아 그동안 활력을 불어넣는 방법이 여러갈래로 논의돼왔었다.
계급제 부활은 장교급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장군 4계급, 영관급 4계급, 위관급 4계급으로 구분되고 원수제가 폐지되는 등 약간 간소화된 것이다.
계급제 출범과 함께 관심을 모았던 중앙군사위 주석「덩샤오핑」(등소평), 제1부주석「자오쓰양」(조자양), 상무부주석「양상쿤」(양상곤)등 국가수뇌급들은 군계급을 갖지 않는 것으로 결론이 났었다.
이는 원수직제가 폐지됨으로써 등소평에게 대장(1급 상장)직을 주기에는 부적합한 탓도 있지만 개방·개혁을 추진하는 중국지도부가 군계급을 가질 경우 군인정부라는 인상을 줄 폐단을 막는다는 고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군계급상 최고지위인 대장으로는 홍학지·진기위·유화청·이덕생 등이 선발되어 군지도 실무를 맡게되었다.
중국은 55년 개최된 제1차 전인대상임위에서 군장교계급제도를 신설했으나 「린퍄오」(임표)가 국방부장(관)이 된 65년 돌연 이를 폐지했다.
『장교와 범사사이, 상하급 사이, 군민사이의 친밀 관계에 부적합하다』는 것이 이유였으며 이를 폐지해야 『장교와 명사, 상하의 일체감을 실현되며 군대의 혁명화를 촉진시킨다』는 명분이었다.
홍군 창설이래 국민당 정부와 싸우던 수십년동안 계급제도가 없이 국내·외의 막강한 적을 패퇴시켰으며 한국전쟁당시「지원군」(중국군)들이 「승리」한 이유도 계급제도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주류를 이루었다.
계급제가 폐지된 65년 중국은 이미 극좌노선에 흐르기 시작했으며 다음해인 66년부터는 중국을 재난으로 몰아넣었던 문화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76년 문화혁명이 끝나고 79년 등소평이 국방현대화를 포함한 「4개 현대화」를 표방하면서부터 군계급제 부활이 논의되기 시작했으며 82년초 이에대한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는 79년 중국과 베트남 국경분쟁을 둘러싼 중 월전쟁당시 중국군의 작전명령이나 부대간 협조가 미흡, 크게 고전했던 중요한 이유중의 하나가 군에 계급이 없기 때문이라는 반성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계급제의 부활이 그리 간단한 것은 아니었다.
84년 제6차 전인대상임위에서 당시 총참모장「양더즈」(양득지)는 계급제를 부활하는 것이야말로 군을 현대화·정규화시키는 것이며 군인과 군대의 책임을 명백히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군에 계급이 있어야 효율적인 협동작전은 물론 군의 국제교류에 유리하고 군대의 조직과 규율, 전투력 등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65년 모택동 임표의 조치를 정면 부인했다.
계급제 부활은 양득지의 공식요청이 있은지 4년만에 중국군과 수뇌부의 논의가 시작된지 8년만에 실현되는 것인 동시에 65년「모와 임의 조치를 극좌에 흐른 착오」로 규정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개혁인 셈이다.【홍콩=박병석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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