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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논술 선생이 된 사연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83호 32면

『할아버지와 손자의 대화』

저자: 조정래 조재면 출판사: 해냄 가격: 1만 2800원

저자: 조정래 조재면 출판사: 해냄 가격: 1만 2800원

소설가 조정래가 외동 아들의 논술 교사가 된 사연을 알고 나면 가슴이 턱 막힌다. 멀쩡했던 아들이 ‘완치 불가능 목 디스크’ 판정을 받고 제대한 이유가 군대 내 상습 폭력 때문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아비. ‘빳다’가 난무했던 자신의 군 시절이 오버랩되며 “가만두지 않겠다”고 펄펄 뛰었지만, ‘한낱 소설가 나부랭이’가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픈 몸을 이끌고 복학해야하는 아들과 신문 사설(社說) 공부를 함께하는 것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소설가가 다시 논술 교사가 됐다. 이번에는 대상이 손자다.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두 일간지가 같은 주제에 대한 사설을 함께 싣고 전문가가 이를 비교분석한 공동기획(중앙일보와 한겨레신문이다!)을 발견하고 “머릿 속에 환한 전등이 켜진” 작가는 논술 입시라는 거대한 산을 눈앞에 두고 있는 두 손자에게 이 기획을 모은 스크랩북만한 선물이 없다고 여겼다.

반전은 고등학교 2학년 큰 손자에게서 나왔다. “할아버지, 써요.” 밑도 끝도 없는 손자의 한 마디를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귀신같이 알아들었다. “응, 재면이하고 할아버지하고 논술 쓰기 하자고?” 그냥 읽어 보기만 하라고 자료를 건넸던 할아버지로서 이보다 더 신나고 가슴 벅찬 대답도 없었을 터였다.

이 책의 시작도 손자의 ‘발칙한 도전’에서 시작됐다. 할아버지에게 보낸 첫 글이었던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은 분량이 무려 A4 용지 여섯 장에 달했고 손자는 ‘아마 할아버지가 더 쓸 게 없으실걸’ 하며 자신만만해 하고 있었다. 이성적인 논리와 별로 고칠 곳 없는 문장에 탄복하면서도 작가는 정성껏 퇴고와 집필을 시작했다. 그래서 “내가 더 잘 썼을지도 모르겠다”던 손자는 할아버지의 글을 보고 “어, 이게 아닌데” 하다가 “제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으로 글이 끝나는군요”라고 두 손을 모은다.

하여 이 책은 우리 시대를 앞서 읽는 소설가와 할아버지의 깊은 뜻을 헤아릴 줄 아는 영특한 손자가 ‘글로 주고받는 대화’다. 최근 우리 사회에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로 부상하고 있는 ‘세대간의 갈등’을 유쾌하게 풀어내는 해법이기도 하다.

책은 ‘단 하나의 시각으로 역사를 해석할 수 있는가’ ‘기업은 사회적으로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가’ ‘청소년의 시간을 제한하는 것은 가능한가’ ‘남자와 여자의 성역할과 그 의미는 무엇인가’ ‘세계를 지배하는 새로운 역병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다섯 주제 아래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을 비롯해 가습기 살균제 옥시 사태·게임 셧다운제·여성 혐오와 페미니즘·비만 등에 대해 50년 터울의 조손이 각자의 시각을 치열하게 전개한다. 새 소설 집필이라는 빡빡한 일정 가운데에서도 시간을 쪼개 손자와 논술 대결을 펼친 작가는 손자가 제시한 소재 중 ‘셧다운제’가 무엇을 뜻하는지 처음엔 몰라 온갖 자료를 새로 찾아가며 공부를 해야했다는 것이 할머니 김초혜 시인의 귀띔이다.

각 챕터의 마지막에는 작가가 손자의 글을 일일이 교정한 원본이 실려있다. 또박또박 정성스레 고쳐준 할아버지의 글씨에는 맹자의 ‘군자삼락(君子三樂)’ 중 세 번째 즐거움이 진하게 배어있다. ‘得天下英才而敎育之三樂也(득천하영재이교육지삼락야·천하의 영재를 얻어 그를 가르침이 바로 세 번째 낙이니라)’.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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