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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시스템 경영입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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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이명환(사진) ㈜동부 부회장이 1980년대 중반 삼성그룹 비서실 인사 담당 상무로 일할 때였다. 어느 날 이병철 회장이 그를 부르더니 "GE나 IBM 같은 미국의 초일류 회사들이 우리와 어떻게 다른지 보고 오라"고 지시했다. 한 달 이상 이들 기업의 전세계 사업장을 샅샅이 둘러보고 온 그를 불러 이 회장이 "그래, 뭘 봤노"하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초일류 기업들은 임직원을 가장 혹사하는 조직이었습니다. 그러나 종업원은 좀체 혹사당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긍지와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일류 기업일수록 직원들의 열정과 헌신을 잘 이끌어낸다는 답이었다. 이 부회장에 따르면 이를 가능케 하는 비결이 바로 '시스템 경영'이다. 그는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이 그룹의 변신을 도모하기 위해 2001년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영입한 인물이다.

삼성전자 종합기획실장, 삼성 비서실 인사 담당, 삼성SDS 사장, 효성생활산업 대표 등의 경륜을 높이 샀다. 이 부회장은 "창업주 타계 이후에도 삼성이 잘나가는 비결을 김준기 회장은 '삼성 시스템'에서 찾은 듯하다"며 "내 역할은 동부에 시스템 경영을 접목하는 게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사명을 '성공 유전자(DNA) 이식'이라고 표현했다. 동부에 합류한 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성과급 제도의 도입이었다. 그러나 주력인 건설업 전통이 적잖게 남아있던 동부그룹 문화와 가벼운 충돌도 있었다. "사명감으로 일하는 사람을 돈으로 매수하려 한다"는 비아냥도 들었다. 그러나 반년 간 끈질기게 임직원들을 설득해 나가면서 조직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김 회장이 개혁의 후원자 역을 든든하게 해 줬다.

"조직이 합의한 기준과 절차에 따라 일을 하는 게 시스템 경영입니다. 인사.평가.예산 각 분야에서 합리적인 약속이 있어야 합니다. 계열사 공통 업무 관리 매뉴얼을 만든 것도 이 때문입니다."

실시간 기업(RTE.경영현황을 실시간으로 보여줌으로써 업무처리 속도를 높인 시스템), DSI(동부시스템인덱스) 같은 정보기술(IT) 기반의 사내 인프라 구축에도 나섰다.

㈜동부는 계열사들에 이런 관리 시스템을 제공하고 경영 실적을 평가하는 일종의 컨설팅 회사 역할을 하고 있다. 조직문화를 좀더 진취적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취미인 마라톤을 주위에 권장하기도 했다.

박재욱 동부 부사장은 "이 부회장이 몰고온 바람이 보수적이고 안정 위주의 동부의 기업문화를 서서히 바꿔나갔다"고 말했다. 5대 핵심산업(소재.화학.건설물류.금융.IT컨설팅)을 주축으로 중장기 발전전략을 세웠다. 최근에는 동부아남반도체가 동부일렉트로닉스로 이름을 바꾸면서 그룹의 핵심사업으로 새 출발을 선언했다.

동부는 이 부회장 영입 이후 삼성 출신을 대거 끌어들였다. 현재 동부그룹 10개 주력 계열사 중 삼성 출신 CEO가 8명이나 된다. 200여 명의 임원 중 80명이 삼성 출신이다. 이로 인한 갈등이 없을 수 없었다.

"진통이 따르는 건 어쩌면 당연합니다. '혁신을 거부하는 건 자유지만 그러면 망한다'는 말을 요즘 자주 합니다."

이현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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