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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전쟁과 눈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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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2호 35면

고선희 방송작가·서울예대 교수

고선희 방송작가·서울예대 교수

늦은 아침을 먹다 목이 메었다. 남북 정상이 판문점에서 만나던 그 날, 둘이 손잡고 군사경계선을 넘던 순간은 정말 감동이었다. 많은 사람이 그 장면을 제일 인상적이었다고 꼽았다.

그런데 내겐 그보다 더 가슴 저리는 장면이 있었다. 남과 북의 정상이 두 아이와 함께 기념 촬영을 하던 그 순간이다. 전형적인 인증쇼트 대형으로 취재진 앞에 선 그들 모습을 보는데, 감정의 빗장이 스르르 풀리는 느낌이 들면서 어디선가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6.25 전쟁의 폐허에서 어린아이가 울고 있었다. 부모의 시신 옆에서 자지러지게 울던 아이... 그 아이를 시작으로 전쟁 통의 아이들 모습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동생을 업고 있던 소녀의 핏기 없는 얼굴과, 미제 깡통을 한 팔에 끼고 구걸하는 소년의 서글픈 미소와,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 앞에서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의 모습. 그 아이들이 이제 칠십이 넘어서 저 장면들을 함께 보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기록영상으로 보아 왔을 뿐인데도,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의 모습과 그 서러운 울음소리는 쉽게 잊히지 않는다. 6·25 당시 10만 명이 넘는 전쟁고아가 발생했다고 하는데, 북쪽의 전쟁고아까지 합하면 20만 이상이 부모를 잃고 그렇게 한평생을 울며 살아왔을 것이다.

북에서 쓰는 ‘꽃제비’라는 말도 원래 6·25 때 전쟁고아를 일컫는 말이었다고 한다. 부모를 잃고 떠도는 부랑아들을 당시 북에선 꽃제비라 부르기 시작했는데, 러시아어로 떠돌이란 뜻의 ‘꼬체비에’에서 유래됐다고도 한다. 그 ‘꽃제비’가 남쪽의 우리에게 알려진 건 1990년대 중후반이었다. 그 시기 북에선 대기근으로 수백만이 아사하던 형편이라 아이들까지 먹을 것을 구해 중국까지 갔고, 거기서 먹을 걸 준다면 무슨 일이든 하는 꽃제비들이 국제사회의 이슈가 됐던 거다. 그때 그 아이들을 꽃제비라 일컫는 언론 보도를 처음 접했을 때 이름이 예뻐서 더 가슴 아팠는데, 그게 6·25 전쟁고아에서부터 시작된 말이라니 더욱 애잔하다.

삶의 향기 5/5

삶의 향기 5/5

얼마 전 부산의 한 전시장에서 본 피난지 시절 광복동 거리의 사진 속에도 전쟁고아가 있었다. 단정한 원피스의 젊은 엄마가 어린 아들과 함께 상점을 나서는 모습을 거리의 소년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해진 옷과 헝클어진 머리, 때에 찌든 새까만 얼굴의 그 사진 속 소년 앞에서 나는 한동안 멈춰 서 있었다.

저 아이가 어떤 삶을 살았을지, 어디서 자고 어떻게 끼니를 구하고 학교는 또 어떻게 다닐 수나 있었는지, 무수히 접했을 편견을 어떻게 견뎌왔을지. 그런 생각을 하니 저 누군가의 삶의 무게가 내 어깨까지 누르는 듯했다. 그도 어디서 울고 있을지 모른다. 전쟁이 끝나도 개인의 비극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상기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울고 있는 아이를 그냥 지나쳐 버린다면, 당신의 기억 속에서 그 아이는 평생 울고 있게 될 것이다.’ 생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에 나오는 말이다. 오래전의 전쟁고아뿐 아니라 우리 사회엔 지금도 가정폭력과 아동학대와 빈곤에 시달리는 아이들이 있다. 주위의 무관심과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울고 있는 아이들이 있다. 그 아이들을 제대로 챙겨 보살피지 못한다면 우리의 기억 속에서 그 아이들은 평생 울고만 있게 될 것이다. 어른들이 전쟁을 그쳐야 아이들의 울음도 그칠 수 있다.

이제 종전선언이 이루어지면 전쟁의 폐허에서 서럽게 울던 아이의 눈물이 비로소 그칠 수 있겠지. 전쟁고아로 칠십 평생 외롭고 서럽게 살아온 분들이 조금은 위로받을 수 있는 그 날을 기대해 본다. 그리고 또한 바란다. 우리 사회에서 어른들의 이기심과 무관심 때문에 우는 아이가 더 이상 없길, 아이들 얼굴에 환한 웃음만 피어나길.

고선희 방송작가·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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