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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김재규재판에 불만…대법원 수술|대법관 사퇴결정 대법원장도 몰라|국보위 파견 판사 대법관인 장인 사표받는 고역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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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80년의 공직자 숙정에 대해서는 그정당성 여부에 관한 시비가 시간이 상당히 흘렀음에도 가시지 않고 있다.
국보위는 백서에서 『고급공무원을 중점정화한 것은 국가기강의 기본요체가 되는 권력 상층부, 특히 지도적 위치에 있는 이들의 부패·부조리를 척결함으로써 공무원사회내부의 심화된 불만과 위화감을 해소함은 물론, 그동안 기회에 편승하고 요령과 술수에만 능한 일부공무원이 고위직에 많이 있던 불건전한 공무원사회 풍토를 쇄신하며,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하는 자가 보답받고 잘되는 공무원사회의 대본을 세움으로써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데 목적이 있다』고 밝혔다.
또 모든 장애요인을 배제, 공정한 심사를 통해 대상자를 선정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숙정을 비판하는측은 『정권 획득을 위한 우회조치였으며 납득할수 없는 방법에 의해 정치적 희생물을 양산해 냈다』고 반박한다.
숙정의 목적과 방법에 대한 이같은 논란은 제6공화국 집권세력과 무관할수 없는 제5공화국의 「정당성」문제와도 얽혀 있어 성격을 복잡하게 하고 있다.
어쨌든 국보위측은 약간의 오류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당시의 숙정은 당연히 있어야 했던 타당한 조치였다고 역설한다.
정화관계자들은「민심수습」이란 말로 부위론을 설명하면서 개혁의 차원에서 행해진 일들을 상당시일이흐른 지금 법적으로 시비를 벌인다는 것은 곤란하다고 주장한다.
L씨는 『만약 급속히 단행하지 않고 조치의 시간이 길어졌다면 이런 청탁, 저런 청탁 다 받느라 아무 일도 못했을겁니다. 부이사관급이상만도 1천2백여명이 되는데 그짧은 시일내에 그들을 스크린, 2백40여명을 추려낸 것은 무척 힘든 작업이었읍니다. 나도 내가 추천하고 보증을 선 후배가 포함되어 곤혹스런때가 있었읍니다.』
조치를 옹호하는 관계자들은 공직자 숙정이 국민들의 상당한 호응과 지지를 받았음은 물론 『정말사심없이 했었다』면서 『위원들의 선후배·친척들도 적지않이 숙정 대상에 포함됐다』고 강조하고 있다.
국보위 사회정화분과위 S위원의증언.
『정보·사정기관의 자료가 부실했던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각자 몇몇 부처를 맡아 직접나가 조사했죠. 해당기관 소속 공무원 10여명을 만나 얘기를 시켜보면 7∼8명의 의견이 일치하는 사람이 있더군요. 그런 사람들을 골라낸 것입니다. 이보다 정확한 평가자료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았읍니다.
C도 기획관리실장인 정모씨의 경우인데 그는 정년을 2년 앞두고 무능 케이스로 대상자가 됐읍니다. 구체적으로 잘못한 점이 없어 구제해보려 했으나 전례가 될까봐 그만 두었읍니다.』
정씨의 경우는 후일 정치풍토쇄신위에서도 문제가 됐다. 정치풍토쇄신위는 구정치인들에 대한 정치규제심사가 주기능이었지만 숙정 고위 공직자의 재심신청도 검토했다. 정씨는 C도의 제일 고참으로 더이상 「올라갈데」가 없던게 죄라면죄였음이 밝혀졌지만 구제의 길은 영영 막히고 말았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그런 예가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부 숙정 공무원들이 결백을 주장하며 이유를 대라고 요구했지만 자료를 제시하면 대개 수긍하고 돌아가더군요.』
또 L전문위원은 이렇게 덧붙였다.
『지금까지의 서정쇄신 작업에서처럼 4각관측을 이용했읍니다. 부처내부의 선후배·동료, 관계기관 자료를 통한 정보취합작업을 4각관측이라고 말하는데 이보다 나은 방법을 발견할수 없었읍니다.
아주 초기단계에는 각부처별로 A급 대상자 1명씩을 선정, 모두 19명을 걸러내기로 했는데 문제점이 계속 나와 확대됐지요. 각부처에서 지탄받는 인사들을 골라낸 것이죠.
아침 6시부터 자정까지 쉴새 없이 뛰었읍니다. 자장면·곰탕으로 점심·저녁을 때워가면서 말입니다. 링게르 바늘을 꽂고 일한 관계자들도 있읍니다. 아무리 계엄이라고 하지만 그때는 말을 않고 있다가 이제 와서….』
R전문위원은 『한가지 밝히고 넘어갈 것은 당시 「숙정」이란 용어는 없었읍니다. 「정화」라는 말 뿐이었읍니다. 숙청이란 말이 공산권에서 사용되기 때문에 찜찜했던 겁니다. 그게 보도과정을 거치면서 정으로 됐읍니다』고 말했다.
『국보위가 주도한 3급이상 공무원의 숙정은 할수 있는 최대한 정확을 기했다고 봅니다. 다만 해당부처에 위임해 진행된 4급이하 공무원 정화에서는 문제가 있었읍니다. 국보위가 부처별로 인원을 하달하지도 않았는데 각부처끼리 눈치를 봐가며 담합, 일정비율을 배당한 것처럼 알려지고 그러다보니 무리도 빚게되고 말입니다.
그많은 공무원을 국보위가 일일이 점검할 수는 없는 일이고…. 3급이상으로 재심을 요구했던 사람이 5명뿐인 점은 일단 당시의 작업이 비교적 객관적으로 처리됐음을 말해주는 것 아닙니까.』 L씨의 거듭된 주장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비판은 비단 숙정됐던 당사자뿐 아니라 숙정작업에 직접 관여했던 사람들에게서도 나오고 있다.
정치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거나 무고성의 잘못된 제보등을 시간에 쫓겨 그대로 수용하는 등으로 애꿎은 피해자도 적지않게 있다는 것이다.
숙정이란 이름으로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김재규재판에 소수의견을 낸 대법원판사들의 경우 정치걱 판단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대표적인예며 모부처의 L차관처럼 인사에 불만을 품은 부하직원의 허위제보가 숙정의 결정적 요인이 된케이스도 있다.
『사법부 숙정이 논의될 때입니다. 김재규재판때 소수의견을 낸 대법원판사들을 정화차원에서 공무원 숙정과 함께 처리하려고 했읍니다. 이때 위원으로 파견돼 있던 김헌무부장판사가 「이래서는 안된다」며 심한 반발을 하는등 우여곡절 끝에 일단 넘어갔읍니다.
그러나 그냥 둘수는 없다는 신군부 고위층의 생각은 여전했읍니다. 이럴즈음 최봉길대구지법원장이 술좌석에서 「2군사령관이 무슨 통뼈냐」고 한말이 악재의 한 빌미가 되고 말았읍니다. 결국은 대법원판사들의 법복을 벗기기로 한 것입니다.』비교적 중립적인 입장에 있던 한위원의 증언이다. 최원장도 부임 두달도 못된 8월19일 사퇴하고 말았다.
당시 국보위에 파견된 사법부 인사는 고시14회인 김부장판사와 사시1회인 손진곤서울고법판사등 2명이었다. 손판사는 그후 광주고법부장판사를 겸직하면서 청와대 민정비서관실에서 근무하다가 86년 서울형사지법 수석부장으로 복귀했으며 이번에 다시 서울가정법원 수석부장으로 전보됐다. 김부장판사는 국보위에서 곧장 법원으로 되돌아갔다.
이들 두 사람은 국보위에 파견됐기 때문에 그후 많은 눈총과 오해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함께 근무한 국보위 관계자들은 이들의 역할에 대한 다른 일면을 강조하기도 한다. 『엄밀하겐 사법부에 대해 이해가 없는 신군부를 설득하고 사법부를 보호하려 노력한 점도 평가해줘야 합니다. 결과적으로는 사법부의 상황이 좋지않게 되고 말았읍니다만….
김판사는 자신의 장인인 임항준대법원판사를 비롯한 대법원판사 5명의 사표를 받으러 다니는 운명적인 역할을 맡아야 했읍니다. 김재규재판이 지연되는데 대해 신군부 리더들은 못마땅해하는 정도가 보통이 아니었읍니다.
노태우대통령이 민정당대표위원 시절 「박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가 민주인사처럼 얘기되며 되살아나려하고…」하면서 김의 문제를 12·12사태의 주요원인으로 언급했듯 대법원의 재판 지연이 군부의 감정을 촉발시켰읍니다.
그래서 이영섭대법원장도 모르는사이 소수의견을 낸 대법원판사들의 사퇴가 결정됐읍니다. 이대법원장은 81년 퇴임사에서 「사법부」를「사법부」로 표기했읍니다.』
관계자들의 이러저러한 얘기들에 대해 김헌무판사 (현대구고법부장판사) 는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면서『일단 무마됐다가 「다른 변수」가생 겨 여러 대법원판사들이 물러났다』고만 말하고 있다. 국보위에 관계하게된 경위에 대해 김판사는 이렇게 증언했다.
『충주지원장으로 막 부임했을 때 서고희법원행정처장으로부터 국보위에 나가라는 전갈을 받았읍니다. 서처장에게 고사의 뜻을 밝혔으나 안된다고 했읍니다. 정화위에 나가 허삼수대령에게 다시 얘기했지만 「면밀히 검토해 선정한 분들이라 곤란하다」며 참여를 요구했읍니다. 지금 할수 있는 얘기는 내 개인적으로 그때가 가장 열심히 일한 시기라는 것입니다.
위원으로 뽑혀 나온 사람들은 전문관료로서 「정화」를 애국의 일념에서 한 것으로 압니다. 「정치적고려」등 여타의 편견없이 일했다고 자부합니다. 이의를 제기한 공무원들에게 자료를 들이대면 모두가 수긍한게 사실입니다.』
공식적으로는 「불과」신창동법원행정처차장·박충정서울고법수석부장판사등 6명의 판사와 일반직 50여명이 정화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대법원판사의 사퇴야말로 사법부에 대한 가장 큰 멍에였다.
당시 계엄병력을 인솔하고 법원에 진주했던 최모씨 (예비역 장교)의 증언.
『높은 분들 (대법원판사등) 의 초췌한 모습은 차마 보기가 민망스러웠읍니다. 내 부하들까지 건방을 떨어 예의를 갖추게하는등 군기를 잡는데 신경을 써야했읍니다.』
또 퇴임과정에서 육체적 고통까지 받은 양모대법원판사의 『사표는 자필이었지만 타의였다』는 말이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다.
비정치적 이유로 물러난 박충정서울국법수석부장판사 (현공화당의원)의 설명.
『법원은 파동이 없을줄 알았는데 예외가 아니었읍니다. 7월 서처장이 부르더니 사표를 내라고 종용했읍니다. 어디서 지명한 것처럼 얘기하면서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읍니다. 처음에는 반발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판사생활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해 사표를 던졌죠. 의원면직 형태였읍니다. 20년의 판사생활을 청산하면서 비애를 느꼈고 재야로 나가 전정권과 한번 싸워볼 각오를 했읍니다.
대한변협 인권위원장을 하면서 나를 제외한 해직 공무원들의 소송을 맡았읍니다. 내 문제는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해직공무원복직투쟁위 고문(이때 숙정된 민주당의 김동귀·장석화의원도·고문) 으로 철저히 파헤쳐 볼 작정입니다.』
박의원은 신창동법원행정처차장·박천직대법원장비서실장등과 사법부의 중추가 돼 일했던게 자신들이 좇겨난 이유라면 이유였다고 주장했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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