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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숲을 흔들고 사라진 바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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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0호 27면

WITH 樂: 게오르크 틴트너의 브루크너

 게오르크 틴트너 지휘의 브루크너 교향곡 2번 음반. 낙소스 레이블에서 나왔다.

게오르크 틴트너 지휘의 브루크너 교향곡 2번 음반. 낙소스 레이블에서 나왔다.

책을 읽을 때면 잘 깎은 연필을 옆에 둔다. 연필과 책 향기를 번갈아 맡다 보면 일상의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이 느껴진다. 물론 책읽기의 가장 멋진 일은 아직 남아 있다. 연필 끝으로 종이의 저항감을 느끼며 가슴 떨리는 문장에 밑줄을 긋는 일이다. 책읽기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자 문장 밑의 흑연(黑鉛) 훈장이다.

‘고전’은 내게 밑줄 많은 책의 또 다른 이름이다. 며칠 전 문득 펼쳐 본 『논어』에도 아니나 다를까 밑줄과 메모가 가득하다. 첫 번째 밑줄이 시작하자마자 보인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나지 아니하니 군자답지 아니한가!’ 별 것 아닌 재주도 뽐내기에 급급한 SNS시대에 이것만큼 어려운 주문도 없다.

생각난 김에 ‘음악계의 군자’라 할 만한 게오르크 틴트너의 브루크너를 찾아 들었다. 그는 마지막 몇 년을 빼놓고는 세계 음악계에 무명의 존재였다. 유태인이었던 틴트너는 2차 대전 즈음 나치의 박해를 피해 클래식 음악 불모지인 뉴질랜드로 건너 간다. 이후 주로 음악계의 변방인 남아프리카·호주·캐나다 등지에서 활동을 했다. 그가 음악 팬들의 관심을 끈 건 염가 레이블인 낙소스를 통해 브루크너 음반을 낸 생의 마지막 5년이 전부다. 1994년 브루크너를 녹음할 당시 이미 그는 입술 쪽에 피부암을 앓고 있었다. 99년 그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스스로 생명을 포기한다.

진공관 앰프 매니아들 사이에서 수명을 다하기 전 뿜어내는 진공관의 불빛과 음색이 가장 아름답다는 식의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틴트너의 말년은 꺼져가는 진공관의 마지막 불빛처럼 또는 수벌의 황홀한 최후의 비행처럼 일생에 단 한 번 아름다웠다.

하지만 나는 그가 세상이 알아주지 않았을 뿐이지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음악의 수도자이자 숨은 실력자였음을 확신한다. 내공도 없는 이가 장대한 브루크너 음악을 들고 나와서 세계 음악팬들의 귀를 한순간에 사로잡을 수 있는 길은 외계인이나 흑마술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음악 외적으로도 그는 평생 검소하고 소탈한 평화주의자였고 채식주의자로서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고 한다. 그의 성품을 미루어보아 말러보다 브루크너 전집을 세상에 남겼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합당해 보인다. 그는 “말러의 음악은 세기말에 대한 ‘걱정과 공포’라면 브루크너의 음악은 ‘고뇌와 의심’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내게도 말러가 거대한 캔버스에 유화를 그리는 작곡가라면, 브루크너는 커다란 화선지에 산수화를 그린 작곡가처럼 느껴진다.

틴트너가 지휘한 브루크너 교향곡 2번은 초판본을 포함하여 대략 5개의 판본이 존재한다. 1872년판과 1877년판이 존재하고 1872년판의 연주회용 판본인 1873년판이 존재하는 식이다. 틴트너는 이중 남들이 많이 쓰지 않는 1872년 초판본을 사용했다. 2번 교향곡은 판본에 따라 곡 순서가 완전히 바뀐다. 예를 들어 초판본에는 2악장이 스케르초로 되어있다면 1877년 버전에는 스케르초가 3악장으로 배치되고 2악장은 안단테 느린 악장으로 바뀐다.

브루크너하면 ‘아다지오의 작곡가’답게 교향곡 2번의 아다지오 역시 넘실거리는 강물처럼 풍요롭고 아름답다. 곡 전체에 걸쳐 아일랜드 국립 오케스트라의 현악사운드가 조금 더 유연했으면 하는 아쉬움과 금관에 탄력이 떨어지고 깊은 맛이 없다는 아쉬움은 남는다.

대숲을 흔들며 지나간 바람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다행이다. 단 한번 빛을 발했던 이의 흔적이 이렇게 남아서 남은 봄을 채우고 있으니 말이다. ●

글 엄상준 TV PD 90empero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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