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다인종 사회'맞을 채비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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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하면서 만난 대부분의 혼혈인은 박양과 비슷한 말을 쏟아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들을 특별한 존재로 본다. 대한민국에서 혼혈인을 차별하는 법률은 없다. 최근 병역법 시행령이 바뀌면서 혼혈인도 본인이 원할 경우 군대를 갈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사고.관습.문화 속에는 '혼혈인=이방인'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성균관대 김통원(사회복지학) 교수는 "한국 사회는 차이와 차별을 분간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뿌리 깊은 '피부색 쇄국주의'가 문제다. 본지의 '단일민족 통념 깨진다' 기사에 달린 인터넷 댓글을 살펴봤다. '동남아시아 여자와 혼혈이 늘어 한민족이 오염되고 있다' 등의 부정적인 글이 많았다. 개방적이라는 네티즌마저 이런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혼혈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벽이 서서히 금가고 있는 현상을 발견한 것은 이번 취재의 수확이다. 최근 국제결혼이 급증하고 있는 농촌에서다. 40여 가구가 사는 충북 보은군 서원리가 그 예다. 이 마을 네 가구엔 5명의 '월남댁'이 시집왔다. 벌써 5명의 혼혈아가 태어났다. 이농현상으로 한동안 아이 웃음소리를 듣기 힘들었던 마을이 활기를 되찾았다. 혼혈 자식들 덕분이다. 서원리에선 이 5명은 손가락질이나 동정의 대상이 아닌 귀여운 손자이자 자식이다. 보수적인 농촌이 가장 먼저 혼혈인에게 마음의 문을 연 것이다.

고령화.저출산으로 한국은 앞으로 국제결혼이 더 늘어날 것으로 전문가들은 전망한다. '한국민=한민족'이란 등식이 깨지는 것이다. 요즘 학계에서도 민족의 정의를 혈연 공동체가 아닌 운명 공동체 또는 지역 공동체로 내리고 있다.

다문화.다인종 사회로 가는 디딤돌을 마련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이철재 사회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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