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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 선택 유가족 방치, 증평 모녀의 비극 불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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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숨진 지 2개월 여 만에 발견된 충북 증평 모녀의 집 앞에 폴리스라인이 붙어있다. 최종권 기자

숨진 지 2개월 여 만에 발견된 충북 증평 모녀의 집 앞에 폴리스라인이 붙어있다. 최종권 기자

지난 6일 충북 증평군의 한 아파트에서 세 살배기 딸과 숨진 지 2개월여 만에 발견된 정모(41ㆍ여)씨는 유서에서 ‘남편이 먼저 떠나고 혼자 살기 너무 힘들다’고 고통을 표현했다. 남편 사망의 정신적 충격에다 경제적 곤궁이 겹쳤다. 전업주부로 살던 정씨는 당장 생활비에 쪼들렸다. 차를 팔려고 시도한 정황을 보면 그렇게 추정할 수 있다. 게다가 같은 달 어머니가 지병으로 숨지면서 정신적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생명, 그 소중함을 위하여 <4> #중앙일보·안실련·자살예방협 공동기획 #남편 숨진 뒤 "어떻게 사나" 호소 #자살 유가족 매년 8만명 발생 #극단 선택 위험, 일반인의 8.3배 #정신적, 경제적 긴급지원 절실

자살 후 남겨진 이들을 도울 시스템, 구멍 드러나

정씨는 남편이 먼저 극단적 선택을 하면서 정신적 충격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중앙포토]

정씨는 남편이 먼저 극단적 선택을 하면서 정신적 충격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중앙포토]

이런 상황에서는 누군가 손을 잡아줘야 하는데, 전혀 그러지 못했다. 한국에는 자살 유가족 지원 체계랄 게 거의 갖춰져 있지 않다. 유가족이 적극적으로 도움 청할 곳을 찾아 직접 요청하지 않는 이상 지원을 받을 수 없다. 이상진 증평군 정신건강복지센터 팀장은 “개인정보보호법 때문에 경찰에서 자살 사건이 접수돼도 정신건강복지센터에는 통보되지 않아서 정씨 모녀를 전혀 알지 못했다”라며 "상담으로 연결됐다면 이렇게는 안됐을텐데...”라고 말했다.

정씨는 남편 사망사건 조사 때 경찰에 여러 차례 “아이랑 둘이서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하다”고 호소했다고 한다. 당시 사건을 조사한 경찰관은 “금전적 어려움을 호소하는 정씨를 위로하고 애도를 표했다”라며 “그 이상 도움 줄 수 있는 게 없었다”라고 말했다.

개인정보보호법이 장애물이긴 하지만 경찰이 이런 상황에 처한 사람을 어디로 연결해서 뭘 지원해야 하는지 모른다. 연결하는 체계도 없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자살 유가족이 자살할 위험은 일반인의 8.3배, 우울증을 앓을 확률은 7배에 달한다. 누구보다 큰 자살 위험에 노출돼 있지만 정부의 자살예방대책에서 비켜 나 있다. 최근 10년간 국내에서 13만8000여명이 목숨 끊었다. 이로 인해 매년 8만명, 10년간 최소 70만명의 자살 유가족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커다란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며 집에 틀어박히거나 우울증·자살 등의 2차 위험 노출된다.

지난해 서울대병원이 유가족 72명을 심층 인터뷰했더니 43.1%가 진지하게 자살을 고려했고 29.2%는 실제로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들의 고통 완화를 위한 지원은 자조 모임과 심리 치료비ㆍ심리 부검 지원 등이 전부다. 2년 전 자살로 남편을 잃은 유가족 윤모(45ㆍ여)씨는 “당장 아이 고등학교 등록금을 내야 하는데 소득이 0원이었다”라며 “가뜩이나 정신적으로 취약해진 자살 유가족이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돕는 긴급 지원 제도가 절실하다”라고 말했다.

자살 유가족은 정신적 문제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는다. [중앙포토]

자살 유가족은 정신적 문제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는다. [중앙포토]

일본의 경우는 자살 사건 현장에 출동한 경찰이 유가족에게 상담 전화번호와 유가족을 위한 지원 내용 등을 담은 팸플릿을 건넨다. 유타카 모토하시 일본 자살종합대책센터장은 최근 중앙일보 취재진에게 “자살 유가족이 자주 겪는 생활고나 우울증 등에 대해 당신을 도와줄 곳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시스템”이라며 “채무에 대한 법률 자문, 일자리 안내, 긴급생계지원, 심리 상담 등 필요한 지원을 제공하는 곳을 연계해준다”고 말했다.

한국자살예방협회 유가족 위원으로 활동 중인 김혜정씨는 “정씨는 자살을 선택했다기보다는 내몰린 것”이라며 “적절한 도움을 받았다면 빚을 정리하고 삶을 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라고 말했다.

서울 마포대교에 세워진 동상. 자살을 고민하는 사람을 지인이 위로하는 모습이다. [중앙포토]

서울 마포대교에 세워진 동상. 자살을 고민하는 사람을 지인이 위로하는 모습이다. [중앙포토]

증평 모녀의 비극

오강섭 한국자살예방협회장은 “가장이 목숨을 끊으면 나머지 가족은 경제적으로 굉장히 곤란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각 지역 정신건강복지센터가 유가족을 직접 방문ㆍ상담해야 하는데 잘 안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면서 “자살 유가족이 생기면 의무적으로 긴급 지원, 정신건강복지센터 연계 등의 조치를 취하도록 자살예방법을 시급히 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스더ㆍ정종훈 기자 etoil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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