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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태, 라구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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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8호 35면

삶의 향기 

민은기 서울대 교수·음악학

민은기 서울대 교수·음악학

놀라운 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니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따라가기 힘들 정도다. 평창올림픽이 끝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남북이 곧 정상회담을 한다하고, 미국 대통령도 북한 지도자와 직접 얼굴을 맞대기로 했다니. 변화는 비단 정치 영역에만 그치지 않는다. 지난번에는 북한 관현악단이 서울에서 공연을 했고 이번에는 우리 공연단이 평양 무대에 섰다. 빠른 변화에 놀라기는 북한 주민들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특히 레드 벨벳의 ‘빨간 맛’은 북한 대중에게는 그야말로 “총 맞은 것” 같은 충격이 아니었을까.
 
음악과 노래가 남북의 닫힌 문을 활짝 여는 해결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음악의 힘 때문이리라. 음주가무를 즐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질에 딱 맞는 일이기도 하다. 북한 공연단과 남한 관객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같이 부르고 “안녕히 다시 만나요”를 외칠 때의 그 벅찬 감격. 우리가 한민족이라는 것에 다른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평양 공연에서의 감동 역시 결코 서울 못지않았나 보다. 공연 내내 환호와 박수가 이어졌고 우리는 하나라는 뜨거운 열기가 대형 공연장을 가득 채웠다고 하니 말이다.
 
화합의 상징인 음악은 그 힘 때문에 역설적으로 프로파간다의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히틀러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독일 국민들이 히틀러에게 빠져든 데에는 음악의 힘이 컸다. 그는 게르만 민족의 신화와 역사, 음악을 총동원해서 영웅의 이미지를 만들었고 그것을 자신에게 투영시키는 데 성공했다. 제3 제국의 주요 행사들에서 장엄하게 울려 퍼진 ‘운명 교향곡’의 모티브 ‘바바바 밤’을 들으면서 독일의 영광에 도취하지 않을 사람이 있었을까. 그렇게 평범한 시민은 추종자가 되어갔고 독일 제국은 프로파간다 위에 세워진 거대한 성이 되었다.
 

삶의 향기 4/7

삶의 향기 4/7

독일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독재와 근대화가 절묘하게 얽힌 프로파간다가 지배하던 시절, 우리나라 초중고교에서는 새마을 운동과 이순신 장군 노래를 의무적으로 불러야만 했다. 모든 음반은 검열을 통과해야 출시할 수 있었고 수록곡의 마지막에는 반드시 건전가요가 포함되었다. 반대로 저항의 기미가 있거나 권력자의 기호에 맞지 않는 곡들은 방송이 금지되기 일쑤였다. 북한 역시 체제를 찬양하는 프로파간다 음악에 밀려 순수 예술은 설 자리를 찾기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남북이 서로를 싫어하면서도 서로가 닮아갔던 비극적 역설이라고나 할까.
 
개인의 음악적 선호나 취향을 다른 누군가가 정해주는 사회는 불행하다. 그리고 음악에도 불행한 일이다. 단조롭고 식상해지는 것이 프로파간다 음악의 슬픈 운명이니까. 음악이야 그저 음악일 뿐. 그러니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에 공감하고 즐기면 될 일이다. 거기에 색깔과 사상을 결부시키는 것이야말로 프로파간다에 얽매인 지나친 강박이거나 아니면 매우 촌스러운 일일 뿐이다.
 
강산에가 평양에서 ‘명태’를 불렀단다. 노랫말에 따르면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약이 되고 안주도 되는 것이 명태다. 내장과 몸통, 아가미, 알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명태가 좋은 줄은 익히 알았지만 남북을 연결해 주는 공감의 다리 역할까지 할 줄이야. 오랜 불신이 하루에 사라지지는 않는다. 이해와 화합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이번에도 속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없지 않다. 그러나 설령 또 속을지라도 그것이 무서워 앞으로 한걸음 내딛는 것을 멈출 수는 없다. 두려움이 결코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내지는 못하니까.
 
북한에 여동생을 두고 온 내 아버지는 내가 자라 고모 나이가 되었을 때, 내 얼굴에서 동생의 얼굴이 보인다며 애달파 하셨다. ‘죽기 전에/ 꼭 한번만이라도/ 만났으면/ 좋겠구나 라고요.’ 북에 계시다는 얼굴도 모르는 고모가 나도 정말 보고 싶다.

민은기 서울대 교수·음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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