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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계의 새 물결] 2. 다시 살아나는 니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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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니체가 죽은 지 1백년이 조금 넘었다. 하지만 그의 철학은 여전히 우리 곁에서 방황하고 있다. '이미' 존재하지만 '아직' 이해되지 않을 때, 철학은 방황한다. 니체가 말했다. 신의 죽음이 방황하고 있다고. 엄청난 사건은 이미 일어났는데, 그 소식이 아직 전달되지 않았다고. 지금 저 하늘에 빛나는 건 천년 전에 사멸한 2천년 전의 별이라고.

오랫동안 우리는 니체라는 상형문자를 잘못 읽어왔다. 특히 '니체'를 '나치'로 읽은 일은 인류 지성이 어른이 되고 난 후 두고두고 창피해할 기억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니체 철학은 한동안 복권되지 못한 채 오염된 기억 속에 갇혀 있었다. 정치적 오독의 원죄를 지고 있던 독일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히틀러라면 정색을 하는 영미 쪽에서도, 히틀러 머리 안에 들어앉았다는 사상가를 해방시켜 줄 생각이 없었다. 그나마 자유로운 곳이 프랑스였다.

그러나 프랑스 철학사에서도 니체가 정말로 새롭게 등장한 것은 1960년대에 들어서였다. 니체는 어느 편지에서 "프랑스인으로 세상에 다시 출현할 때가 되었다"고 했는데, 정말 1960~70년대의 프랑스는 자신의 니체를 낳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푸코는 자신이 처음으로 니체를 읽었을 때 경험을 이렇게 표현했다. "데카르트.칸트.헤겔.후설 등 대학의 유서 깊은 전통에 따라 훈련받은 사람이라면, 니체의 '즐거운 지식'이 얼마나 특이하고 재치있으며 우아한 텍스트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때 당신은 말할 것이다. 나는 나의 동료나 교수들이 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젊은이들을 모아 놓고 시대정신을 훈육하는 철학교육에 반대하며 철학자의 지위를 '국가가 내려주는 관직'이라고 비꼬았던 사람이 니체였다. 중요한 것은 선배 사상가들이 만들어 놓은 개념을 정리하고 외우는 게 아니다. 니체는 항상 묻곤 했다. "너희는 너희 사상을 위해 싸울 준비가 되었는가." 진정한 철학자는 자기 개념, 자기 사상을 창조한다. 위대한 선배들의 철학을 사랑한다면 거기에 예속되지 말고 그것을 부숴버려라. 그러고는 더 위대한 철학을 낳기 위한 소중한 재료로 활용하라. 그것이 그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방법이다.

◆"사상 위해 싸워라" 주문

니체는 자기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일정한 자격을 요구했다. 그 자격이란 학식이나 교양 같은 게 아니었다. 더 많이 길들여진 두뇌나 과시용으로 끌어모은 지식은 방해만 된다.

그가 요구한 것은 낡은 습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정신이었다. 이 점에서 프랑스의 68세대는 요즘 말로 '코드'가 맞았다. 똑같은 텍스트를 읽은 선배들에게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이들에게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 독서란 화학반응 같은 것이다.

일정한 온도가 되어야 반응이 진행된다. 이들에게는 니체가 반응의 초기 조건으로 제시했던 것이 있었다. 니체가 '탈주자의 장소'라고 불렀던 자유정신, 들뢰즈는 자신이 거기에 반응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들이 만난 니체가 똑같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 니체가 똑같았다고 하더라도 니체와 반응하는 그들 각자가 달랐다. 때문에 이때 출현한 니체는 하나가 아니었다. 이들은 니체를 해석하면서 니체를 창조했다. 니체 자신이 그렇게 가르쳤다. 위대한 철학자에게는 그렇게 보답하는 것이라고.

따라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니체는 무덤 속에 있는 그 사람이 아니다. 그는 항상 방황하다 누군가와 합체한 존재로서, 가령 푸코의 니체, 데리다의 니체, 들뢰즈의 니체로 나타난다.

푸코의 니체에서 우리는 근대를 극복하기 위한 사유의 출발점을 확인한다. 푸코는 니체의 '신의 죽음' 속에 '인간의 죽음'에 대한 기대가 담겨 있음을 알아차렸다.

모든 신적인 물음을 다시 인간적인 것으로 바꾸어 던졌던 근대적 인식 틀을 고려할 때, 신의 죽음은 곧바로 인간의 죽음을 의미한다. 인식과 실천의 주체로서, 진화의 정점으로서, 가치의 원천인 노동의 소유자로서, 지배와 해방의 주체로서의 인간. 근대적 사유가 인간에 대해서만, 그리고 인간을 위해서만 묻고 답했다면, 탈근대적 사유는 정확히 니체가 발견하고 기대했던 지점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니체는 세계에 대한 총체적 해석을 시도하는 형이상학자들의 병적인 태도를 꼬집었는데, 그것을 잘 보여주는 건 데리다의 니체다.

데리다는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것들이 '거리의 원격 효과'로만 존재한다고 말한다. 선/악, 정상/광기, 저자/독자, 남자/여자, 서양/동양 등의 모든 이항 대립들은 이러한 '거리'를 전제함으로써만 나타난다. 따라서 각각의 의미들은 이 결정불가능한 '거리' 때문에 고정될 수 없고 언제든 해체 가능한 것이다.

들뢰즈의 니체에서는 생성의 철학자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진다. 세계는 생성과 소멸을 반복함으로써 다양한 존재들을 만들어냈다. 들뢰즈는 니체가 말하는 영원회귀, 즉 '동일한 것의 되돌아옴'이 사실은 생성 행위의 반복을 가리키며, 그때마다 생산된 것은 동일한 것이 아니라 차이와 다양성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들뢰즈의 니체는 생성의 철학자이며 또한 차이의 철학자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극히 일부의 새로운 니체 얼굴을 확인했지만, 사실 현대 사상가들은 방황하는 니체와 마주칠 때마다 사유의 전부를 걸어야 했다. 해석학자들은 진리를 검증하기에 앞서 진리를 추구하는 앎의 의지 자체를 문제삼아야 했고, 그 진리가 의욕하는 바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했다.

"사실들로 하여금 말하게 하라"고 외쳤던 역사학자들은 비역사적인 사실들의 안개 속에서 왜 어떤 것들이 역사적 사실로서 튀어나왔는지에 답해야 했고, 사실들 뒤에 자기 목소리를 감추는 이상한 복화술도 그만두어야 했다.

◆자유정신 프랑스서 '반응'

심리학자들은 외부 세계의 단단한 원자만이 아니라 내부 세계의 단단한 원자도 부수어야 했다. 화가들은 하나의 소실점, 그 특권화된 시각체제에 대한 니체의 비판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또한 음악가들은 근대적 화성체계를 의심해야 했고, 작가들은 저자의 죽음에 대해 고민해야 했다. 니체와 마주칠 때 사유의 전부를 걸어야 한다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것은 니체가 문제삼고 있는 것이 현대 사상이 뿌리박고 자라온 토대 자체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니체는 더 이상 유행하지 않는다. 니체를 연구하는 어느 미국 학자는 80년대 이후의 독해 수준이 60~70년대보다 퇴보했다고 한탄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이 유럽의 우경화 때문이라고, 즉 우파들은 니체와 민족주의를 접속시키는 낡은 시도를 반복하고, 좌파는 소극적으로 덜 위험한 구절만을 찾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온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욕망이 식으면 니체 철학은 반응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2003년의 한국은 어떤가. 꽤 뜨거워졌다고들 하는데, 과연 니체와의 어떤 반응을 기대해도 좋은 것일까.

고병권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

◆약력=▶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사회학과 박사과정 수료▶소장연구자들의 학문공동체인 '연구공간 너머'에서 니체 강의▶저서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천 개의 눈, 천 개의 길'이 있고, 번역서로 '한권으로 읽는 니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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