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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시급 1400엔에 모신다는데도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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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남윤호 기자 중앙일보 미주중앙일보 대표
남윤호 도쿄 총국장

남윤호 도쿄 총국장

‘아르바이트 모집 중, 시급 1400엔~’. 도쿄 긴자와 신바시 경계쯤의 주유소에 몇 달째 내걸린 간판이다. 지난해 1200엔이었던 이곳 기본시급은 연초 1400엔으로 올랐다. “이 동네 덮밥집도 1400엔 준다. 1200엔으론 사람을 못 구해 올렸다.” 주유소 매니저의 설명이다. 대개 1000~1100엔인 편의점·수퍼마켓·식당보다 꽤 높지만 극단적인 건 아니다. 며칠 전 NTT도코모가 휴대전화 가입자들에게 보낸 알바 정보 메일엔 시급 1500엔짜리가 즐비하다.

일본, 경기 뜨자 임금 절로 상승 #최저임금 올려 될 일 아닌 듯 #빈곤층 지원한다는 것도 착각 #생산성 향상 없인 백약이 무효

지역별로 다른 일본의 최저임금은 평균 848엔. 도쿄가 958엔으로 가장 높다. 이 숫자는 최저기준일 뿐이다. 요즘 일본에서 최저임금만 주다간 최저인력 구하기도 어렵다. 임금 상승을 두고 전문가들은 처음엔 인구구조 변화에 주목했다. 소자화·고령화로 노동력이 감소해 그렇다는 분석이었다. 그러다 아베노믹스로 경기가 눈에 띄게 나아지자 시각이 바뀌었다. 경기회복으로 노동수요가 커진 게 임금 상승의 주요인이라는 게 결론이다. 최저임금이 높아져 그렇다는 말은 나오지도 않는다. 최근 일본을 다녀간 한국 경제학자들이 이를 곧 학계에 보고할 예정이다.

최저임금 인상은 일본에서도 중요한 정책이다. 단, 우리와는 달리 인상폭이 완만하다. 아베노믹스의 성장전략 중 ‘최저임금 연 3% 정도 인상’이 담겨 있다. 2차 아베 정부 출범 직전인 2012년 평균 749엔이던 최저임금은 5년간 13.2%(99엔) 올랐다.

최저임금이 매년 차근차근 오르는데도 일본 기업의 반발은 보이지 않는다. 경제가 살아나면서 실제 시급이 최저임금 인상폭 이상으로 성큼성큼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 여건, 지급 능력 따지지 않고 최저임금부터 뭉텅 올린 우리로선 부러울 따름이다.

남윤호칼럼

남윤호칼럼

지난해 16.4% 인상이 우리 경제엔 어떤 영향을 남겼나. 밀어붙인 분들의 성취감은 뜨겁겠지만 산업 현장의 체감은 싸늘하다. 물가 상승, 중소기업 부담 증가, 취약계층 고용 악화…. 이 때문에 제도 개선, 인상폭 조절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크다.

1년간 실험해봤으니 고칠 게 있으면 고치는 게 맞다. 착각을 일으키는 계산 기준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일본에선 정기적인 교통비·숙박비를 최저임금에 넣지만 우리는 뺀다. 또 한국엔 주휴수당이 있지만 일본엔 없다. 똑같은 기준으로 계산하면 한국의 최저임금은 이미 일본 평균을 넘고 도쿄와 비슷하다.

그럼 노동생산성은 그만큼 높아졌나. 일본생산성본부에 따르면 2016년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국 중 31위다. 구매력을 반영해 돈으로 치면 시간당 33.2달러다. 1위인 아일랜드(95.8달러)와는 3분의 1 수준이다. 일본은 46달러로 우리보다 38% 높다. 우리의 경우 생산성은 낮은데 최저임금은 정권의 완력에 올라타 상승 중이다. 이게 지속 가능한가. 생산성 향상 없이 임금을 강제로 확확 높이면 시장 어딘가 왜곡이 드리워진다. 당장은 안 드러나지만 돌고 돌아 언젠가 발병하는 법이다.

게다가 1만원 고지를 돌파하기 위해 설정한 폭력적 인상은 기업의 원성을 사고 있다. 높이더라도 단계적으로 하는 게 상식이다. 미국·영국에서 최저임금 인상이 고용 감소와 무관하다는 연구가 나온 것은 인상폭이 완만해서다. 우리처럼 급격히 올리면 시장이 감당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지금의 계산 방식과 인상폭을 고집하는 건 노·정의 과잉방어다.

정부도 은근히 긴장은 하는 모양이다. 5일 공공조달에 최저임금 인상분을 반영하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일자리 안정자금 지원 등에 이어 기업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란다. 난폭한 인상의 충격을 시장 여력으론 감당하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그렇게 해서라도 빈곤층의 살림이 나아지면 괜찮다. 하지만 최저임금 인상이 정말 정의로운 빈곤대책인가.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최저임금 근로자 중 빈곤층의 비율을 약 35%로 산정한 바 있다. 일본은 이보다 적다. 도쿄대·히토쓰바시대 연구팀 분석 결과 최저임금 근로자 중 연 소득 300만 엔 미만의 저소득층 가구주는 15%에 불과하다. 연소득 500만 엔 이상 가정의 주부·청소년이 전체의 50%를 차지한다. 생활비·용돈 보태자고 아르바이트하는 이들이다. 최저임금을 높여준다고 꼭 빈곤층이 혜택을 보는 건 아니다.

최저임금이 빈곤대책으로 유효하지 않다는 건 입증됐다. 유효하다고 우기는 건 위선과 착각 사이의 어딘가다. 또 이를 정책으로 집행하는 건 영점 안 맞는 총을 쏘는 셈이다. 똑똑한 경제관료들이 이를 모를 리 없다. 그게 아니고요, 하고 바른말 하면 목이 떨어지는 판이니 그저 고개 푹 숙이고 안 맞는 소총 방아쇠를 당기고 있다. 위선과 비겁의 참호 속에 수북이 쌓일 탄피엔 납세자들의 혈흔이 배어 있다.

남윤호 도쿄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