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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제주를 가라, 제주에서 배우라(II)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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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한국전쟁을 제외하고는 현대 한국 최대의 비극인 제주 4·3사건 70주년을 맞았다. 70년 전 제주도민들이 겪었던 절대비극 앞에 삼가 머리를 숙인다. 당시 제주도민들이 겪었던 고통은 인간의 모든 상상을 초월한다.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영령들이 이제는 안식을 취하길 간절히 기도드린다.

제주화해모델을 전국화하고 #세계화-보편화-항구화하자 #영구 평화를 향한 구체적 증거인 #화해·상생의 제주정신 보호하며 #미안한 겸허로 함께 배우자

70주년 전야제에서 유족들로 구성된 4·3평화합창단이 부른 평화의 노래는 그들이 감내해 온 단장의 한을 넘어 모두의 가슴을 때린다. 70주년 추념식은 정부 고관들이 아닌 생존 피해자와 유족들이 중앙에 자리해 국가와 유족, 가해와 피해의 동석과 공존, 화해와 상생을 상징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국가폭력에 대한 ‘깊은 사과’와 함께 진상규명 운동에 대한 ‘깊은 감사’마저 표명해 참여 유족과 4·3단체들을 감동시킨다. 그러고는 ‘4·3의 완전한 해결’을 약속한다.

무엇보다 제주 4·3은 국가폭력이었다. 좌익 지도부에 대한 진압은 국가의 존재 이유인 합법적인 질서유지 임무였다. 그러나 일반 도민에 대한 무차별 탄압은 명백한 국가폭력이었다.

둘째, 저항과 항쟁이었다. 자율적 제주 공동체를 파괴하는 억압에 대한 공동대응을 말한다.

셋째, 수난과 학살이었다. 엄청난 피해는 비극의 크기에 비례하는 과제와 유산을 남긴다.

넷째, 운동으로서의 4·3이다. 대비극 이후 4·3운동은 진실과 정명, 명예회복과 해원을 향한 몸부림이었다. 4·3운동은 삶의 회복과 평안을 향한 인간의 본원적 지향을 말한다.

끝으로 정신으로서의 4·3을 말한다. 대비극 이후 4·3정신은 생명과 자치, 평화와 인권, 화해와 상생으로 압축된다. 그리하여 끝내 인간 존엄의 구극을 지향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절대비극의 산물인 4·3정신이 마침내 인류 보편을 품는 까닭이다.

박명림칼럼

박명림칼럼

이 모든 4·3의 의미 지평들은 제주와 한반도와 세계를 포괄해야 한다. 즉 세계와 한반도는 극한의 이념 대결과 폭력을 제주에 강요했다면, 제주는 거꾸로 세계와 한반도에 평화와 화해의 대비약을 선물하고 있다. 악을 선으로 갚는 대역전과 대긍정을 말한다.

실제로 제주민들은 오늘날 이념 대결과 절대비극을 넘어 진실과 정의, 평화와 화해를 향한 고결한 도정을 보여준다. 필자는 제주의 경이를 ‘제주화해모델’ ‘제주치유모델’로 불러 왔다. 특히 제주의 화해·상생은 안으로부터의 화해·상생이라는 점에서 더욱 감동적이다.

용서와 관용, 화해와 상생은 강요돼선 결코 안 된다. 밖과 위로부터 강요된 화해는 또 다른 폭력이며 ‘거짓 화해’일 뿐이다. 안과 밑으로부터의 자발성에 바탕한 제주화해모델은 깊은 감동과 함께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좁디좁은 사익과 이념과 진영에 달라붙어 연대와 연합, 협치와 통합을 거부하는 우리는 제주에서 거듭 배워야 한다. 그리하여 남남갈등 극복과 남북 평화공존, 그리고 세계 갈등 해결의 한 모범적 전범을 창출해야 한다.

제주 모델의 요체는 화해·연대·공생의 정신이다. 제주민들은 4·3의 진상규명 과정이 갈등의 재연이 되지 않도록 자제와 호양정신을 발휘해 폭력과 처벌 대신 높은 수준의 협력과 공존을 현시했다. 진상규명 과정은 민주적·절차적·평화적이었다.

특히 진실, 정의, 자율, (민관)협력, (민간-민간)연대의 정신은 가장 소중하다. 제주 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결성, 희생자 선정, 제주 4·3평화재단의 설립 및 운영, 도와 각 마을 수준의 추모사업들은 민간 자율, 진실과 정의, 민관 협력과 통합의 모범을 보여준다. 그러나 제주의 진실과 정의는 용서·화해와 만나 파괴가 아닌 놀라운 ‘창조적 정의’로 나아간다.

하귀·상가·장전·북촌의 마을 유족회와 위령시설의 설립 주체·과정·운영·재정의 문제를 탐구하면 할수록 진실과 정의, 민간 자율성, 해원과 상생, 민관 협력이 4·3치유모델의 정수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완전 파괴된 마음과 마을을 복원하는 저 내강(內剛)한 자기 극복의 모습은 끝내 공동체와 나라를 바꾸고 한반도와 세계도 동참하라고 손짓한다.

제주화해모델을 전국화하고 세계화하며, 보편화하고 항구화하자. 그를 위해 남은 핵심 과제들, 즉 배상·보상조치, 불법 재판 피해자의 법적 구제, 미국의 유감과 위로 표명, 그리고 중앙과 지방의 정부 교체를 넘어 준수돼야 할 공통 준거의 확립과 같은 미완 과제의 조속한 실현은 필수가 아닐 수 없다. 화해와 상생의 제주 정신을 보호하자. 자부하자. 영구 평화를 향한 구체적 증거가 우리 곁에 있다. 미안한 겸허로 함께 배우자.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