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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세계시민의식을 일깨우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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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8호 35면

정재승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미래전략대학원장

정재승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미래전략대학원장

국제학회에 참석해 과학자들끼리 모여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선 어김없이 북한 문제가 화제에 오른다. 김정은은 과연 어떤 인물인지, 한반도 비핵화는 가능한지, 독일의 통일전략이 우리에게도 유효한지 물어본다.

편 갈라 경쟁하고 싸우는 미래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줘서는 안 돼 #우리 모두는 호모 사피엔스로서 #동시대 사는 지구인 인식시켜야

나처럼 한국 사람이 식사 자리에 끼어있다 보니 북한이 화제가 된 거겠지만, 그들은 이미 북한 문제에 대해 꽤 많은 걸 알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북한과의 정치적 대립 역사와 김일성부터 김정은까지 내려온 북한의 외교전략, 중국·미국·일본을 포함한 한반도 긴장까지 토론이 이어진다. 깊이 있는 대화 속에서 어떻게 그들에게 우리의 현실을 설명할지 난감했던 적이 종종 있다.

식사의 대화는 이내 시리아 난민 문제로 옮겨갔다가, 필리핀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의 폭정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로 옮겨간다. 또 시진핑의 장기집권 전략을 왜 중국인들이 묵인하는지로 갔다가, 어느새 기독민주당 대표인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추진하려는 사회민주당·기독사회당과의 대연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로 옮겨간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전 세계를 한 바퀴 돈 것 마냥 어지럽다.

얼마 전 유네스코(UNESCO)에서 작은 글을 부탁해 와 전 지구적인 소재를 찾다가 유럽 친구들과 저녁식사 경험을 떠올리고는 슬며시 웃게 됐다. 그들과 나누는 식사 자리에서의 토론은 내가 지구인이라는 자각을 느끼게 해준다. 내 삶은 한반도의 작은 도시에 머물러 있지만, 내 뇌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지구 전체를 사려 깊게 살핀다. 이러한 자각은 ‘지구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라는 실천적 질문으로 이어지기에 결국 생산적이다.

그러다가 이내 머릿속에 한 질문이 떠올랐다. ‘만약 시리아 난민들이 배를 타고 우리나라 서해로 도착해 온다면, 우리는 그들을 받아들일 것인가?’ 우리는 과연 어떤 결정을 할까? 우리는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학교가 우리나라 학생들에게 반드시 가르쳐야 할 것이 있다면, 나는 지구인으로서의 자의식이라고 믿는다. 오랫동안 한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교육받았고 민족주의의 세례를 받아온 우리에게 세계시민으로서의 인식은 턱없이 부족하다. 제대로 교육받은 적도 없고,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도 무지하다. 유네스코가 세계시민의식을 교육하고 있지만, 우리나라 학교들도 공교육에서 다루어야 할 주제다.

‘내 나라’ ‘내 민족’하면서 서로 편을 갈라 경쟁하고 싸우는 미래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어서는 안 된다. 서로 다른 나라와 민족이 만들어온 고유의 문화를 아끼고 다양한 세계관을 존중하되, 우리는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동료의식을 심어주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호모 사피엔스로서 지구라는 행성에 함께 살아가는 지구인임을 뚜렷이 인식시켜야 한다.

세계시민의식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면 친구라고 받아들이는데 각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교육하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 두면 그들은 서로 배척하는 관계가 될 것이다. 국제뉴스를 거의 접하기 힘든 현실에서 이웃에 대한 무지는 결코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좁은 한반도 안에서만도 150만명이 넘는 외국인들이 살고 있는데, 학교는 학생들에게 서로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있다.

외국인들과 함께 지낸다고 해서 세계시민의식이 바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 뇌는 낯선 타인을 만나면 ‘우리 편인지, 남의 편인지’를 빠르게 식별해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판단하도록 진화돼 왔다. 이런 구별 능력은 위협적인 존재를 미리 식별하거나 우호적인 집단에서 안전한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아직까지 남아있다.

남자와 여자라는 성별이 다른 친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학교에서 제대로 교육해야 하는 것처럼 다른 나라 사람들을 올바르게 대하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으면 스스로 깨우치긴 어렵다. 어린 시절부터 교육하고 서로에게 관심과 애정을 갖도록 일깨워주어야 한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우리말을 가르치고 우리 문화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그들의 생각과 문화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갖고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는 태도를 배우는 것이 어쩌면 더 중요하다. 그래야 우리는 비로소 공존할 수 있다.

지구인과 지구 생태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어린이들부터 청소년, 젊은이들, 어르신들까지 전 세대에게 두루 교육하는 것! 이것이 세계시민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우리가 시급하게 추진해야 할 노력이다. 피부색, 언어, 문화에 상관없이 호모 사피엔스에 대한 애정이 우러나도록 세계시민의식을 공유해야 한다.

138억년 전에 탄생한 이 우주의 먼지 같은 존재인 우리가 지구라는 행성에 지금 살고 있는 것은 그 자체로 기적이다. 이렇게 작은 존재가 우주의 크기를 짐작하고, 지구 생태계의 수많은 생명체와 함께 공생하며, 75억명의 지구인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것 또한 경이로운 일이다. 이런 먼지 같은 존재들이 서로 편 가르지 않고 공존하기 위해 애쓰는 것, 그것이 세계시민의식의 첫걸음이다.

정재승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미래전략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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