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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작두타기」40년의 "접신"큰무당|해서 대동굿·배연신굿 김금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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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처음 인터뷰를 받을 무렵엔 번번이 눈물을 좔좔 흘렸노라고 했다. 그동안 살아온 역경을 돌이켜서 얘기하기가 그렇고, 그나마 알아준다는 기쁨때문에 목이 먼저 콱 메었다고 했다. 인생은 어디서건 사노라면 과거가 생기는 법. 그 과거사를 털어놓고 인터뷰할 처지가 됐다면 시련의 세월을 딛고 이제는 앞가릴만큼 신수가 퍼졌다는 증좌인데 왜 눈물이 쏟아지는 것일까.
『어머니께 죄많이 졌죠. 얼마나 한 평생을 가슴 아팠으면 그랬겠어요. 무당이 문화재됐다고 말씀드리니까 내 그만 눈감아도 여한이 없다, 그러셨죠.』
4년전 작고할 때까지 내내 딸을 지켜 함께 기거해온 노모의 오한이었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선관이라해서 국가적인 대제의 제사장구실을 했다고 하지만 이제는 세월이 바뀌어 사회의 저변에서 설움을 겪는 원시신앙의 잔영.
그 쓰라림과 안쓰러움을 같이하려는 어머니된 심정이야 여북했으fi.
작두 타기로 유명한 인천의 만신 김금화여사(57)가 중요무형문화재 제82호 해서풍어제의 주무로 지정되기는 1985년. 그러니까 20대초의 새파란 황해도 만신이 낯선 피난지인천에서 자기 터전을 확보하는 일부터가 커다란 시련이었다. 더구나 새마을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신당이 사정없이 헐리고 온갖 구실 아래 굿판이 훼방을 받을 때 그저 아득하기만 했다.

<미순회때 성가발휘>
『세상에 절망은 없습니다. 문화재라니 꿈밖이었죠. 보통 사람들은 그런 쓰라림이란게 어떤 것인지, 소설에나 있는 얘기거니 실감이 안나겠지만 정말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어요.』
l982년 한미수교 1백주년 기념공연으로 미국에 갔을때 6개 종목이 파견되었다. 그런데 첫 시발지 LA에서 김모대사가 구접스럽게 무당굿을 보여주느냐고 굳이 못하게하는 것을 도리어 당지 박물관측의 재요청으로 겨우 공연하는 촌극을 빚었다.
그런데 그때 순회공연중 녹스빌국제박람회장에서는 뜻밖의 이변이 생겼다. 주최측에서 한국공연단의 리허설 광경을 보곤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출연을 사절하는 것을 조자용씨가 우격다짐해서 가까스로 막판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주어진 시간조차 다 소비한 나머지 김여사는 불과 15분동안에 대단원을 마무리하게 됐다. 말하자면 한국공연단의 성패가 이 15분안에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굿판을 제대로 벌일 겨를이 없었다. 또 옷 (무복)을 갈아입을 짬이 없으리라 싶어 몇벌을 껴입었다가 차례로 벗을수밖에 없었다. 만수받이할 틈도 없어 무대로 나가면서 맞이굿을 하고 단번에 작두타기에 들어갔다. 수건을 작두로 썩둑 끊어 보인뒤 잠시 관객을 살폈다. 모든 사람들이 손을 쥐고 숨죽이고 있었다. 『여기서 딛고 일어서야 한다.』이 일념으로 한순간이 지난 얼마 뒤에야 박수치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미국 공연담은 그의 생애를 통해보면 단적인 예에 불과하다. 접신의 경지, 망아경 속에서 이제까지 살아왔는지 모른다. 세월의 바람이 거세게 할퀼수록 모지게 초자연적 힘으로 솟구치는 것이 생명력이다. 연평도어장을 상대로 하는 큰굿으로 출발한 큰무당이기 때문에 그런 당찬 힘을 깔고 일어서는 것이리라. 그 굿당의 주신 역시 공교롭게도 파란만장했던 임경업장군이다.
해서 배연신굿과 대동굿의 본고장 옹진에서는 보통 닷새 혹은 이레씩 계속되는 축제요 풍어의 기원 의식이었다. 대동굿은 당산의 당굿에서부터 어민의 가가호호를 방문하는 새경굿, 그리고 바닷가의 용신굿으로 연결되는 마을전체의 축제. 배연신굿은 선주들이 각기 어로작업의 안전과 풍요함을 기원하는 선상의 뱃굿이다.

<5∼7일간 계속>
이 두 성격의 굿이 만신(무녀)에 의해 집행되고 선주들의 경제적 부담으로 뒷받침되는 까닭에 결국 선주 그룹과 일반 어민 사이를 결속시키는 하나의 행사로 진행되게 마련이다.
옹진에서도 큰굿은 강익만을 끼고 있는 봉아면 가맛개·육섬·개머리·동남면용호도·연평도등 어촌에서 자연히 크게 벌였으며 서로 자기네의 단골 만신을 초대하기 위해 제비뽑기를 했다.
따라서 큰굿(대동굿·도당굿등)을 맡는 만신에 있어서도 한 집단이 형성돼 명성을 걸고 경쟁하게 마련.
큰굿이라 하면 쌀이 7짝이요, 소 잡고 돼지 잡고 부두에서 도가 (주관자로 선발된 선주집)까지 온통 조화의 꽃길이 꾸며졌다. 그리고 하나한 준비부터 진행에 이르기까지 엄격한 절차가 있었다. 가령 소를 잡을 적에도 무당이 신칼과 창을 들고 쇠등을 오르내리며 소를 어른 뒤에 비로소 상산막둥이가 도살했다.
옹진은 황해도지만 원래 38선 이남이고 유독 어민이 많던 고장이다. 동란 후에는 지역 여건이 가장 가까운 인천일대에 무더기로 이주해 정착했다. 실향군민회를 연다면 20만명은 족히 되리라는 추산이다.
1955년 덕적도에서 망향의 대동제를 가진 뒤 한동안 서로 모일 계제를 얻지 못했다. 생활의 터전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시절이다. 그러다가 60년대 후반부터 탈춤놀이와 민요등을 민속경연대회에 참가시키면서 고향에 대한 새로운 유대가 일깨워지기 시작했다.
김금화여사는 그 민속경연대회를 통해 부각된 인물이다. 67년 첫 출연때에는 「배치기」(에밀량)같은 민요 종목으로 선보였다. 배치기는 대동굿의 일부분이지만 차마 굿이라는 말을 입밖에 내지 못했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그게 굿거리임을 알고는 그 굿에 대한 것을 더 흥미로와했다.

<대형꽃장식 볼만>
그래서 68, 69년에는 민속놀이로 각색한 굿의 형태로 무대에 올렸다. 급기야 72년에 장려상과 더불어 개인상까지 차지하자 『TV문학관』에 녹화되고 용인민속촌에 초대돼 굿청을 차리기도 했다. 「맨발 벗고뛴 보람」이 10년 못돼 밝은조짐으로 서서히 내다보이는 듯 싶었다.
이 고장 특유의 배연신굿에는 육지에서 볼수 없는 묘한특징이 있다. 서리화와 봉죽 같은 대형의 꽃장식이 유난스럽고 긴 장대에 단 호기와 장군기·오색기등이 뱃전에서 나부끼는 것도 일대 장관이다. 뿐만 아니라 선상에서 울려퍼지는 악기 소리와 화려한 복색으로 차린 무녀들의 모습이 한껏 축제다운 분위기로 젖어들게 한다.
배연신굿은 굿거리마다 다양하게 무복을 바꿔 입는다. 뱃머리에서 굿이 진행되는동안 뱃동사 (선원) 들은 고물간 위에서 북을 치며 배치기 노래를 주고받고 춤을 춘다. 더우기 배 위에서의 굿거리가 끝날 무렵 무녀와 악사와 굿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져 벌이는 뒤풀이는 원초적 축제를 재현하는 무도다.
뱃굿 과정에서도 용궁타기(물동이에 올라서기)를 하고 광대탈을 머리에 붙인채 사설을 늘어놓으며 혹은 긴 무명 폭을 양끝에서 잡고 떡을 담아굴리는 이른바 쑹거주는굿도 베푼다. 그야말로 연희적 요소가 짙은 굿판이다.
김여사는 이제 해서 출신 만신의 대표격이다. 아직 60전의 왕성한 활동기로 패기있는 추진력과 통솔력을 갖추었다. 세습무는 아니지만 40년간 무르익은 연희력이 더 큰 재산이다.
본시 옹진 태생이다. 흥미보통학교를 다니다 14세에 결혼하고 16세에 헤어졌다. 무병이 든 때문이다. 어디 아픈데라곤 없는데 잠이 안오고 악몽에 시달리고 남의 생사 문제에 아는체 끼어들고…식구들이 눈치채고 펄쩍 뛰었지만 이미 어쩌는 수가 없었다. 외할머니 (권천일) 가 호침굿을 해주어 내림만신이 되자 몸이 저절로 나았다. 그때가 17세.
19세때부터 대동굿에 참여했다. 해주만신 방수덕여사가 꼭 데리고 다녔다. 총기가 좋아 5년만에 큰무당이 됐다. 큰무당이 되면 적어도 20명이상 거느리는 리더여야 한다.

<생활속에 깊은뿌리>
서해안을 중심으로한 중부지방 무당의 특색은 무당이 되는 기본적 과정으로 무병을 경험하게 되고, 개인적으로 신을 모신 제장으로서의 신당을 가지며, 무구를 사용하고 악기에 맞춰 무무와 무가를 하는점을 들수 있다.
이러한 요건은 바로 한국 전래의 샤머니즘과 상통되는 것이며, 그점 동해안이나 남해안의 무당과는 유형을 달리 한다.
그래서 서해안 무속은 특히 민족종교가 갖는 민속예술을 싹트게 하는 모태 역할을 해왔고 민중의 생활속에 깊게 뿌리내려 밀착됐음에도 오늘날에는 그 기능이 쇠퇴하거나 상실해버린 부분도 적지않다.
거의 여성을 대상으로 국한되거나 극히 현실적인 개인의 초복 행위로 일관하는 경향이 농후한 것이다.
그러한 오늘의 사정에 비추어 본다면 해서의 대동굿과 만신의 존재는 비교적 전래의 형태를 고스란히 갖춘 본보기가 된다. 원형의 보전을 유지해 갈수만 있다면 그대로 남겨두고 연구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
금년도 소래 대동굿의 도가였던 전충철씨 (인천시논현동)는 『이런 것이라도 있어야 어촌의 분위기가 흥성해지겠기에 시작했읍지요. 이젠 여기가 고향이 다 됐는데도 인심이 날로 뻑뻑해지누만요.』
전씨의 생각은 지극히 소박한 향수고 소망이다. 그 옛날의 무속 (대동굿) 이라고 해서 전씨의 생각과 달랐을리 만무하다.
마을의 화평과 협동을 꾀하기 위한 구심적인 행사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다만 시대의 격변으로 사람들끼리의 유대가 전만같지 못할 따름이다. 그것도 현저한 이기심으로 말이다.
글 이종석 (중앙일보 출판기획위원 문화재 전문위원)
사진 채 흥 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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