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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재승 칼럼

현대사회의 빅맨 리더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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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정재승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미래전략대학원장

정재승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미래전략대학원장

기업이나 조직에서 리더십을 강조하고 교육하기 시작한 건 1970년대 무렵이다. 그 전까지는 리더십에 대한 개념도 명확하지 않았고, 어떤 리더십이 훌륭한 리더십인지, 이를 구성원들에게 어떻게 교육할지 불분명했다. 미국 메릴랜드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제임스 맥그리거 번스 교수가 루스벨트에 대한 저서로 1971년 퓰리처상을 수상하고, 78년에 『리더십』이란 책을 내면서 리더십은 기업 경영의 화두로 자리 잡게 됐다.

빅맨은 원시시대 부족 우두머리 #민주적이고 제한된 영향력만 행사 #현대사회 빅맨은 공동 목표 위해 #지위가 아니라 행동과 인품으로 #신뢰와 존경을 받는 리더가 돼야

그런데 대개 인간은 대뇌에 리더십이 아닌 ‘팔로십’이 내장돼 있다. 유명한 실험에 따르면, 사람들을 모아 과제를 제시하면 리더를 정하라는 지시가 없더라도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팀을 이끌 리더를 찾는다. 우리는 무리 안에서 누구의 말을 따르는 것이 내게 가장 유리한지 빠르게 판단해 그를 따른다는 얘기다. 나서지 않기에 책임을 회피하고, 나보다 똑똑한 사람의 의사결정을 따르는 팔로십 전략이야말로 훌륭한 생존전략이다. 팔로십은 자체 내장돼 있는데 리더십은 내장돼 있지 않다 보니 조직은 맨날 리더십 교육을 하지만 대개 형식적인 행사에 그친다.

한때 리더십 연구에서는 카리스마를 강조하기도 했다. 리더는 교육으로 양성되는 것이 아니라 타고나는 것이라 믿었던 시절도 있다. 이른바 위인론이 성행하기도 했고, 타고난 기질이나 특성을 강조한 특성론, 어린 시절의 특별한 경험을 중시했던 정신분석 이론이 득세하던 시절도 있다. ‘아버지를 이기려는 자가 리더로 성장한다’는 스토리 말이다.

하지만 카리스마가 있는 리더가 조직에서 더 나은 성과를 만들어내는 건 아니다. 카리스마는 능력과는 상관없이 사람으로 하여금 그를 따르게 만드는 매력이니, 더 나은 성과를 만들어낸다는 보장은 없다.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조직은 중앙집중적인 권력을 지양하고 다양성을 강조하는 수평적 리더십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다. 심지어 최근에는 구성원을 섬기는 ‘섬김 리더십’까지 등장했다.

정재승 칼럼 3/10

정재승 칼럼 3/10

조직에서 누가 ‘리더’로 선택되는 걸까? 리더의 권력은 원시 시대부터 풍부한 자원과 사회적 통제권, 그리고 이성에 대한 섹스의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다 보니 이에 대한 욕망이 큰 인간들이 리더가 되길 원했다. 빌 클린턴은 모니카 르윈스키와 스캔들을 일으킨 후에 왜 그런 죄를 저질렀느냐는 질문에 “그럴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 바 있다.

그러다 보니 권력 피라미드의 최상층에서는 종종 잘못된 리더들이 발견된다. 지나친 자기애, 마키아벨리즘(수단을 가리지 않는 과도한 절대권력 추구), 사이코패시(폭력성을 동반하는 반사회적 이상 심리)가 그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구성원을 착취하고, 조직의 이익과 자신의 이익이 상충할 때 과감히 자신을 선택한다. 우리 사회에 등장한 미투 운동은 권력을 함부로 사용한 자들의 부끄러운 민낯을 생존자들이 용기 있게 폭로하는 운동이라 볼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리더는 개인적 욕망을 넘어 조직과 사회를 위해 기여하려는 욕망이 강한 자이다. 리더로서의 권한을 더 나은 조직, 더 근사한 사회, 모두가 살고 싶은 세상을 만드는 데 사용하길 꿈꾸는 자에게 리더를 맡기고 싶다.

실제로 연구에 의하면, 세계 각지의 문화권에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리더의 자질에는 공통점이 많다. 넬슨 만델라나 간디를 떠올리게 하는 관대함, 공정함, 능력, 훌륭한 인품, 말과 행동의 일치 등이 그것이다. 네덜란드 조직심리학자 마크 판 퓌흐트는 자신의 저서 『빅맨(selected)』에서 가장 이상적인 리더의 인지적 원형을 원시 부족의 ‘빅맨(Big Man)’에서 찾는다. 인류학에서 많이 연구돼 온 개념인 ‘빅맨’은 원시 시대 소규모 부족의 우두머리를 일컫는 용어다. 외형적 조건은 당시 환경에 맞게 건장하고 남성적이지만 ‘던바의 수’라 불리는 150명 규모의 부족을 이끌던 이 사바나의 리더는 민주적이고 자비로운 성향을 갖고 한정된 영향력만 행사했다.

현대사회에서 리더로서의 빅맨은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을 뜻한다. 지위로서가 아니라 그의 행동과 인품으로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을 말한다. 지난 10년간 대한민국은 그릇된 리더십과 탁월한 리더십이 한 사회를 얼마나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수 있는지 경험하고 있다. 고통 받은 자들이 누구를 찾아가 폭로하고 하소연하는지 보라. 공감해주는 권력, 신뢰할 만한 언론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살펴보라. 직위와 권한을 남용하지 않고 행동과 인품으로 신뢰와 존경을 받는 리더들이 이 복잡한 현대사회에서도 사바나의 빅맨처럼 필요하다는 걸 여실히 보여준다.

정재승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미래전략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