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사고 난 배마다 자동선박 위치 발신장치(V-PASS) 먹통, 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통영 제일호 침몰 모습. [사진 통영해경]

통영 제일호 침몰 모습. [사진 통영해경]

지난 6일 경남 통영시 욕지도 인근 좌사리도 남서방 4.63km 해상서 전복된 59t급 쌍끌이 어선 제11 제일호는 침몰 당시 ‘바다의 비상벨’이라 부르는 자동선박 위치 발신장치(V-PASS)가 고장 난 상태였다. 수백 미터 거리에 떨어져 있던 같은 선단의 제12 제일호가 11 제일호의 상황을 파악하고 오후 11시34분쯤 해상교통관제센터(VTS)에 “배(11 제일호)가 넘어간다”고 신고를 하지 않았다면 해경의 구조작업이 더 늦어졌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함께 조업하고 있던 12 제일호도 V-PASS는 아예 꺼져 있었다. 해경 관계자는 “V-PASS가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으면 VTS 모니터에 침몰 표시가 나타나지 않아 그만큼 구조작업이 지연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난 6일 통영 제일호, 지난달 28일 전남 근룡호 등 #사고 난 배마다 V-PASS 고장나거나 작동 안한 것으로 드러나 #불법 조업이나 어장 정보 숨기려 일부러 V-PASS 꺼는 경우 많아 #

해경은 12 제일호가 V-PASS를 꺼놓은 것이 불법 조업과 관련이 있는지를 조사 중이다. 11 제일호가 전복된 채 발견된 곳이 조업금지구역이어서 해당 어선이 불법으로 조업하다 사고를 낸 것인지 확인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생존자 등으로부터 고기잡이를 끝낸 지 20여분 전후로 사고가 발생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며 “당시 기상여건과 배 속도를 고려할 때 조업 가능 구역과 30분~1시간 정도 떨어져 있어 불법으로 조업했을 가능성이 있어 수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베트남 생존자 마이쑤언람(28)씨는 본지와 인터뷰에서 “고기잡이 작업을 마치고 그물도 다 끌어 올린 상태에서 파도가 치면서 배가 옆으로 뒤집혔다”며 “배가 뒤집힐 때 다른 베트남 생존자 2명과 함께 먼저 물에 뛰어들어 구조됐다”고 말했다.

사고 위치도.[통영해경]

사고 위치도.[통영해경]

해양수산부와 해경은 2011년부터 2015년까지 전국 4만여대의 선박에 V-PASS를 달았다. V-PASS는 침몰 등의 위급 상황 시 배의 위치를 VTS에 자동 보고하고 일정 각도 이상 기울면 자동으로 구조신호를 보내는 등 바다의 비상벨 역할을 하는 안전에 필수 장비여서다. 그러나 상당수 배가 V-PASS가 고장이 난 채 항해나 조업을 하고 아예 꺼버리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 해경과 전문가들의 말이다. V-PASS를 꺼놓으면 VTS에 배와 관련된 정보가 보내지지 않아 불법 조업 등이 가능해서다. 한 해경 관계자는 “일부 어민들은 자신만이 알고 있는 어장이나 낚시용 포인트가 다른 사람에게 알려질까 봐 일부러 V-PASS를 꺼버리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지난 7일 제일호 침몰 사고 후 대책 회의 중인 해경.[사진 통영해경]

지난 7일 제일호 침몰 사고 후 대책 회의 중인 해경.[사진 통영해경]

근룡호의 사고 당시 모습. [중앙포토]

근룡호의 사고 당시 모습. [중앙포토]

그러나 V-PASS가 꺼져 있을 경우 사고 때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지난달 28일 오후 4시28분쯤 전남 완도군 청산도 인근 해상에서 전복된 채 발견된 7.93t급 어선 근룡호가 대표적 사례다. 근룡호는 하루 전 오전 9시쯤 선장과 선원 등 7명을 태우고 완도항을 출항해 여수시 거문도 해상에서 조업했다. 이후 28일 낮 12시 56분쯤 진모(56) 선장이 지인에게 “기상 악화로 청산도로 피항한다”고 통화한 후 연락이 끊겼다. 약 3시간 뒤 지나가던 유조선이 전복된 근룡호를 발견했다. 당시 해상은 높이 3m 파도가 치고 시속 15m 강풍이 불었다. 해경 관계자는 “근룡호는 조난을 당하면 자동으로 구조 요청을 발신하는 V-PASS(어선위치식별장치)를 장착했으나 당시 작동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며 “고장이 난 것인지 일부러 꺼 둔 것인지는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근룡호 모습. [연합뉴스]

근룡호 모습. [연합뉴스]

39t급 복어잡이 어선 '391 흥진호'가 강원 속초시 속초해양경찰서 부두에 입항하고 있다. [뉴시스]

39t급 복어잡이 어선 '391 흥진호'가 강원 속초시 속초해양경찰서 부두에 입항하고 있다. [뉴시스]

지난해 10월 북한에 나포된 흥진호도 북한 수역으로의 진입을 감추려 항해 도중 V-PASS 껐던 것으로 드러났다. 해수부는 흥진호 사건을 계기로 후속대책을 내놓았다.  지난 5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연근해 조업어선 안전관리 대책’을 발표한 것이다.  유럽연합(EU) 등 선진국에서 시행하는 ‘어선안전장치 봉인제도’도 도입이 대표적이다. 어선이 조업 위치를 노출하지 않기 위해 임의로 전원을 끄거나 조작하는 행위 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는 목적이다. 여기다 어선안전조업시스템인 지오펜스(GEO-fence) 기능도 추가한다. 지오펜스는 어선이 특정 수역을 벗어날 경우에 대비한 자동경보 시스템이다. 해수부는 올해부터 순차적으로 이런 정책을 펼쳐 나갈 계획이다.

 흥진호 모습. [연합뉴스]

흥진호 모습. [연합뉴스]

김길수 한국해양대 해사수송과학부 교수는 “V-PASS 등이 사고 시 최소한의 안전장치라는 것을 선장과 선원들에게 자주 교육하고 해경도 이것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사전 점검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며 “V-PASS 같은 안전장치를 선장 등이 임의로 조작하지 못하게 하고 의무적으로 운영하게 하는 등의 제도 손질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통영=위성욱·이은지 기자 we@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