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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례법」폐지해야 한다(이은윤<문화부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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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우리나라에는 온 국민을 범법자로 만드는 악법이 있다. 대한민국국민이면 적어도 이 법을 일생동안 몇번씩 범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바로 「가정의례에 관한 법률」이다. 그 옆에는 「가정의례에 관한 법률 시행령」「가정의례 준칙」등의 대통령령이 들러리를 서고 있다.
시정의 서민에서부터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이들 법령을 한번이라도 어기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확실히 말하지만 내 스스로도 이들 법령을 여러번 위반했다.
경조기간중에 문상객이나 축하객에게 술·음식을 대접할 수 없는데(법제4조) 대접을 했고, 결혼을 할때 함잡이를 보내는 일을 금지했는데(준칙6조2항) 함을 지워 보냈다.
상례의 경우 고인의 영전이나 묘소에는 10개까지의 화환·화분을 진열할수 있고 예식장에는 2개까지만 허용된다.
또 혼례에서는 당사자 친족에 대해서만 음식물을 대접할수 있고 상례때는 상가일을 돕는 사람과 매장지까지 따라간 사람한테만 음식대접이 허용된다. 힘깨나 쓰는 권력층·지도층·상류층은 거의가 의례때 화환을 너무 많이 진열한 죄를 지었을게 분명하고 아무리 어렵고 가난한 사람이라도 결혼식 축하객이나 상가를 찾아온 문상객에게 소주 한잔 대접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세상에 이처럼 만백성을 범법자로 만드는 악법이 동서고금 어디에 있었을까 싶다.
저 희랍의 철인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니 지켜야 한다면서 독배를 받아 마시고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에 따라 이 악법을 잘 지켜야할지, 아니면 이따위 법은 폐지시켜야할지 이제 결단을 내려야할 때가 된것 같다.
관·혼·상·제의 가정의례를 규제하는 이들 법령은 법을 도저히 지키기 어려운 까다로움뿐만 아니라 법을 무시해도 별것 아니라는 준법정신의 파괴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독소를 지니고 있다.
거미줄 같은 모든 실정법들의 법적 권위가 자꾸만 땅바닥으로 떨어지는데는 범법자가 되고서도 소리 칠수 있는, 만민을 범법자로 만드는 가정의례법 같은 법령에도 책임이 적지 않을것 같다.
최근 민주화시대를 지향하면서 정부와 각 정당이 제도적 개선책의 하나로 악법의 개폐를 목청 높여 외쳐대는 가운데서도 가정의례법 같은 악법중의 악법은 거의 무시되거나 저 끝머리에 「개정」대상으로 겨우 그 이름이 보인다.
입법의 칼날을 쥔 국회의원들의 혜안에 어찌해서 이같은 악법이 보이지않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우리 생각으로는 가정의례에 관한 법령은 개정이 아니라 당장 폐지돼야할 우선순위의 악법중의 악법이다.
관·혼·상·제와 같은 가정의례는 어떤 실정법에도 우선하는 대표적 「관습법」이다. 특히 이같은 의례는 인생의 단계적 마디를 맺어주는 통과의식으로서 일상의 삶을 이어가는데 아주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준다.
우리에게는 나름의 혼례와 상례·제례가 오랜 역사동안 이어져왔고 그 의미 또한 세계에 내놓아 뒤질게 없는 미풍양속이었다.
혼례만해도 신부를 영원토록 사랑하고 부군을 평생의 반려로 받들겠다는 주례앞의 서약을 중심으로하는 서구적 「계약사상」에 기초한 신식결혼식(가정의례 법령권장)보다는 청실·홍실을 늘어뜨리고 초례상에서 원삼 족두리와 사모관대의 복장으로 맞절을 하는 구식 혼례가 훨씬 우주 창조의 원리를 내포한 차원 높은 음양의 결합이라는게 문화인류학자들의 견해다.
상례·제례도 재래의 유교적 관습이 재조명되면서 고도의 종교성까지 갖춘 의식문화라는 평가를 새삼 받고 있다.
물론 전통 혼례와 상례·제례등은 시대변화에 따른 절차의 간소화, 시간의 단축등과 같은 「변형」이 불가피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의식의 본정신과 핵심적인 절차등을 살린 고유의 전통의례는 마땅히 계승되어야 한다.
몇해전 이야기다. 정부 고위관리를 만난 자리에서 전통 결혼식을 부활시켜야한다고 했더니 당장 법령을 고치든지 폐지시켜 구식 혼례를 할수 있게 해야겠다고 장담했다.
당시 구식혼례는 가정의례 법령의 권장사항이 아니라는 이유로 허용이 안됐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문화재보호협회가 구식 혼례식장을 개설하니까 서울시청에서 결혼식장 허가도 없이 영업을 한다고 「단속」에 나서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하는수 없이 전통혼례보존회라는걸 만들어 회원제 운영의 편법으로 비켜섰고 상당기간이 지난후에는 내무부까지 나서 구식혼례 장려에 나섰다.
이제 지난날의 제도적·구조적 모순을 청산하고 민주화시대를 열겠다는 뜨거운 염원을 진정 실현시키려면 우선 가정의례법령 같은 어두웠던 시절의 악법을 시급히 폐지해야 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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