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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니까 그 정도는” … 제대로 처벌 안 해 ‘괴물’ 키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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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이제 시작이다 <중>

‘내 삶을 바꾸는 성평등 민주주의’를 주제로 제34회 한국여성대회가 4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에 참여한 한 어린이가 ‘#MeToo #WithYou’ 피켓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내 삶을 바꾸는 성평등 민주주의’를 주제로 제34회 한국여성대회가 4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에 참여한 한 어린이가 ‘#MeToo #WithYou’ 피켓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성폭력 피해를 고발하는 ‘미투(#MeToo)’바람이 한 달 넘게 계속되고 있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피해자의 폭로가 등장하고 있다. 심지어 명지전문대 연극영상학과 남자 교수 4명 전원이 성 추문에 휩싸였다. “성폭력이 일상에 공기처럼 스며 있었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 성폭력은 왜 이토록 만연했던 것일까.

한국 사회 성폭력 만연 왜 #문단, 최영미 폭로에 “왜 들추나” #성추행보다 조직 망신 되레 걱정 #‘입시·콩쿠르’ 계파 나눠먹기 철옹성 #미투 용기 내려면 “인생 건 도박”

◆방치·묵인·봉합=대학로 극단 대표 K는 요즘 “6년 전에 터졌기에 망정이지…”라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2012년, 극단 조연출이 술자리에서 신입을 추행했다. 일회적인 실수였고 조연출도 사과했다. 대표도 그 선에서 마무리하려 했다. 하지만 여자 단원 2명이 “2차 피해를 줄 수 있다”며 퇴출을 요구했다. 대표가 말렸지만 단원들은 강경했다. K는 “그때 수업료를 지불한 덕분에 극단의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미투 터지고 나서 ‘너희 덕에 (우리 극단이) 살았다’고 했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사태 악화의 주요 요인으로 성폭력 응징에 대한 집단적 기억이 부재하다는 사실을 꼽는다. 조직 내에서 성 문제가 발생할 경우 공개-조사-규명-(가해자) 처벌을 거치기보다 묵인-방치-봉합-(피해자) 인내의 과정을 경험하며 “부끄럽지만 관행일 뿐”이란 인식을 심어주었다는 설명이다. 국내에서 미투의 전조가 없었던 건 아니다. 2000년대 초반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 뽑기 100인 위원회’가 있었고, 2015~16년 문학과 미술·영화계에서 ‘#문화계_성폭력’ 운동이 일어났지만 전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성폭력 피해자 지원 받을 곳

성폭력 피해자 지원 받을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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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의 문화=최영미 시인이 지난해 고은 시인의 행태를 폭로하자 문단에선 성추행을 문제 삼기보다 “왜 굳이 들추느냐”는 비난이 더 컸다. 문인 전체를 성추행자로 보지 않겠느냐는 걱정도 많았다. 문화인류학자 김은희 박사는 “루스 베네딕트가 분석한 ‘수치의 문화’(shame culture)의 전형”이라고 진단했다. 집단주의가 팽배한 탓에 위반 자체보다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는 것에 더 민감한 정서가 ‘그들만의 왕국’을 만들었다는 분석이다. 이는 18년간 성폭력이 횡행했던 이윤택의 연희단거리패에서도 비슷하다. 단원들은 “어떡하든 쉬쉬하며 안에서 해결하려 했다. 밖에 알려지면 큰 망신”이라며 우려했다.

◆스승과의 예속 관계=2년 전 ‘#문단_내_성폭력’ 운동이 벌어졌을 당시 가해 남성이 피해 여성에게 빈번하게 던졌던 말은 “도덕의 벽을 깨라”였다고 한다. 이성미 여성문화예술연합 대표는 "예술가에게 허용되는 표현의 자유를 위계질서에 의한 성폭력의 빌미로 악용한 셈”이라고 말했다.

일부 예술계에선 “미투를 할 수 있다는 게 그나마 건강하다는 증표”라는 말도 나온다. 스승과의 예속 관계가 체화된 분야에선 성(性)을 운운하기 어려운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전통춤 관계자는 “입시, 콩쿠르, 국공립 단체 입단, 무형문화재 전수 등이 계파별로 나눠 먹으며 철옹성처럼 얽혀 있다. 거기에 균열을 가한다는 건 인생을 건 도박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일상화된 성폭력은 결국 빈곤한 민주주의의 증거라는 진단이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는 “1987년 이후 30여 년간 겉으로 보이는 제도적 민주화는 진척됐을지 몰라도, ‘삶의 민주화’는 여전히 구시대적이고 폭력적이었음을 미투가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개인의 존엄을 환기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 특별취재팀=이지영·최민우·노진호·최규진·홍지유 기자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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