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베니스 영화제…눈에 확 띄는 영화 없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8면

베니스 국제영화제는 전통적으로 아시아 영화에 관대한 편이다.

1950년대 일본의 미조구치 겐지 감독과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을 발굴해 서양에 알린 게 베니스 영화제였고, 80년대 이후 대만의 허우 샤오시엔이나 차이밍량, 일본의 기타노 다케시에게 처음 주목한 것도 베니스였다. 그래서인지 지난달 27일 개막한 제60회 영화제도 아시아 영화, 특히 일본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 보였다.

경쟁부문에 '자토이치'를 출품한 기타노 다케시의 인기는 대단했다. 2일 밤 '자토이치'가 상영된 살라 그란데 극장은 25유로(약 3만3천원)라는 비싼 입장료에도 불구하고 8백여석이 가득 찼다.

'자토이치'는 신기(神技)에 가까운 검술을 지닌 맹인이 마을을 괴롭히는 사무라이 집단을 제거하고 평화를 찾아준다는 이야기다. 구로사와의 '요짐보'와 '7인의 사무라이'를 연상시키는 이 영화에서 기타노는 자신의 영화적 기량이 절정에 달했음을 과시했다.

그는 검투 장면이나 음악의 사용, 편집, 유머 등 테크닉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기교에 집착한 나머지 영화적 무게는 다소 부족해 보이긴 했지만 관객들은 열광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타이틀이 올라오는 3분여간 관객들이 기립해 2층에 앉은 기타노에게 열렬한 박수를 보내는 장면은 서양에서 그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했다.

하지만 영화제 전체적으로는 비교적 차분한 분위기다. 이제 후반으로 접어든 4일 오전 현재 경쟁부문 출품작 20편 중 절반 이상 공개됐으나 두드러진 작품은 눈에 띄지 않는다.

팀 로빈스와 사만다 모튼이 주연한 마이클 윈터바텀의 '코드 46'은 SF적인 러브 스토리를 다뤘으나 공허하다는 게 중평이었다.

70년 아르헨티나 군사독재 시절을 배경으로 안토니오 반데라스와 에마 톰슨을 내세워 만든 영국 감독 크리스토퍼 햄프튼의 '이매지닝 아르헨티나'는 객석의 야유를 받았을 정도였다.

66년 '퐁네트'이후 7년 만에 베니스를 찾은 자크 드와이옹(프랑스)감독의 '라자'는 프랑스의 돈 많은 노인과 사랑에 빠지는 모로코의 젊은 여성에게 초점을 맞췄으나, 범작이라는 평을 얻었다.

개최국 이탈리아의 중견 감독 파올로 벤베누티의 '국가기밀'이 공개된 후 역사적 진실 여부를 놓고 이탈리아 내에 한바탕 논란이 인 것이 화제라면 화제다.

이 영화는 47년 시칠리아에서 노동절 행사를 열던 2천여명의 노동자와 시민을 대상으로 산적들이 총격을 가해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을 소재로 했다.

벤베누티 감독은 이 영화에서 당시 산적들로 하여금 시위 군중에게 발포하도록 부추긴 배후에는 정부와 교회.마피아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내용이 알려지자 당시 사건에 관계했던 인물들이 "역사를 날조하지 말라"며 항의하는 등 한바탕 '진실 게임'이 벌어졌던 것이다.

경쟁부문에 초청된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은 3일 자정(현지시간) 감독과 문소리.황정민씨 등 주연 배우들이 참석한 가운데 언론 시사를 했다. 좌석 1천3백석 중 1천석 가까이가 채워졌다. 기자들은 문소리가 지난해 '오아시스'로 신인배우상을 받은 때문인지 그의 연기에 많은 관심을 보이는 눈치였다.

특히 현대 한국인의 성 풍속도에 흥미로움을 표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지나친 정사 장면에 고개를 흔드는 일부 기자들도 볼 수 있었다.

시사회가 끝난 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연출 의도를 묻는 질문에 임상수 감독은 "현재 한국 사회는 기존의 남성 위주, 가부장적 질서가 무너지는 변화를 맞아 여성적인 가치가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어 이 영화를 만들게 됐다"고 답했다.

한 기자가 그의 전작이 미혼 여성들의 솔직한 성 이야기를 다룬 '처녀들의 저녁식사'인 점을 들어 "성 문제에 천착하는 것 같은데 동성애 영화를 만들어볼 생각은 없느냐"는 질문을 던지자, 임감독은 "상업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성을 소재로 택한 것뿐이며 동성애 영화는 동성애자 감독이 더 잘 만들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주연 문소리씨는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 전라 연기가 힘들지 않았느냐"고 하자 "처음에는 곱지 않은 시선이 많아 힘들었지만 배우는 예술가라는 책임감으로 무사히 해낼 수 있었다"고 대답했다.

한편 이번 영화제에서 이란 감독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열네살짜리 딸 하나가 화제를 뿌렸다. 하나는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억눌린 상황을 담은 '광기의 쾌락'이라는 작품으로 국제 비평가주간에 초대받았다.

그러나 영화제 측이 이 영화에 18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부여한 바람에 감독이 정작 자기 영화를 볼 수 없는 사태가 벌어져 뉴스의 초점이 됐다. 9월 3일이 생일인 하나는 결국 집행위원장이 특별허가증을 발행해 뒤늦게 다른 작품들은 보게 됐지만 자신의 영화는 결국 못 보고 지나쳐야 했다.

베네치아=이영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