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트렌드] 고정관념 깨야 뜬다

익숙한 것, 뻔한 걸로는 관심을 끌 수 없는 시대다. 대충 이 정도면 이런 행사는 때울 수 있겠지 하는 지레짐작은 어긋나기 일쑤다. 심지어 벽돌이 마구 쌓여 있고 흙먼지가 자욱한 공사판에서도 패션쇼를 여는 세상이다.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거부하는 이런 일들은 경쟁이 치열할수록,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싶은 '개성'이 강조될수록 더욱 커진다. 그 출발점은 우선 눈에 익은 공간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장.소.파.괴'는 게릴라처럼 곳곳에서 출몰하고 있다.

글=최민우 기자

*** 2층 건물 쇼윈도서 패션쇼를

지난 1월 말 서울 명동 중앙로. 한적한 평일 오후 거리에 500여 명의 군중이 갑자기 개미떼처럼 모여들었다. 그들의 시선은 어느 상가 2층으로 쏠려 있었다. 쇼윈도 안에서 늘씬한 미녀들이 사뿐사뿐 걷는가 싶더니 깜찍한 표정을 짓기도 하고 춤까지 추면서 행인들의 발길을 붙들었다. 회사원 이우석(24)씨는 "처음엔 가만히 서 있어 인간 마네킹인 줄 알았어요. 근데 갑자기 화려한 패션쇼로 바뀌는 거예요. 서민들이 어디 저런 패션쇼를 쉽게 볼 수 있겠어요. 눈요기도 되고 신기하기도 해서 한동안 자리를 못 떴죠"라고 말했다.

'쇼윈도 패션쇼'는 청바지 회사 게스가 봄 신상품을 맞아 내놓은 아이디어 이벤트. 무대를 디귿 자로 꾸며 안쪽에선 패션업계 인사를 불러 정식으로 관람케 하고 바깥에서는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도 볼 수 있게끔 꾸며 화제를 낳았다. 안쪽에서 차분하게 패션쇼를 지켜보다 바깥 풍경이 궁금하다며 뛰쳐나간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단다. 게스 박석민 대리는 "패션쇼 하면 어딘가 배타적인 '그들만의 잔치'란 이미지를 털어내고 보통 사람도 함께한다는 취지를 살리기 위해 준비했다"고 말했다.

*** 얼음판 신차 발표회, 주차장 파티

'장소파괴' 현상은 패션쇼뿐만 아니라 자동차와 향수.화장품 등 신제품 출시 행사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고 있다. 올 초 볼보 자동차는 신차를 선보이면서 전문 전시장이 아닌 아이스링크에서 출시 행사를 했다. 볼보 이관희 과장은 "독특한 공간이 미디어의 관심을 끌기도 하지만 새 차가 4륜 구동이라 눈길에서도 미끄러지지 않는다는 것을 눈앞에서 확실히 보여줄 수 있어 얼음판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다음달 신제품을 내놓는 화장품 회사 맥은 주차장에서 신제품 출시 기념 파티를 열 계획이다. 이벤트업체 앤시스의 안현서 대표는 "정형화된 것을 거부하는 측면과 함께 방랑자적인 제품의 성격을 보여주기 위해 야외의 허름한 공간을 선택한 것"이라고 말한다. 제품의 이미지를 독특한 공간을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한다는 뜻이다. 업계에선 이를 '파괴 마케팅'으로 부르기도 한다. '차별화의 법칙'의 저자 홍성준 박사는 "기대한 것에서 어긋날 때 마케팅 효과는 극대화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장소파괴 현상은 앞으로 더욱 거세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 패밀리 레스토랑 결혼식도

마케팅 전략으로만 장소파괴가 이용되는 건 아니다. 다음달 7일 결혼식을 올리는 이모(29)씨 커플은 패밀리 레스토랑 베니건스에서 예식을 치르기로 했다. "결혼식장이 무슨 도떼기시장 같이 물건 팍팍 찍어내듯 하는 것이 싫은 거죠. 그렇다고 고급 호텔에서 우아하게 치를 만큼 경제적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남과 다르면서도 하객들에게 색다른 재미를 주고 싶어 뻔한 결혼식장을 탈피한 겁니다." 최근 고급 레스토랑 탑클라우드에서 매주 일요일 결혼식이 벌어지는 것도 예전과는 다른 풍속이다.

문화 행사가 답답한 실내를 벗어나 야외에서 거행되는 경우는 허다하다. 신라 면세점 옥상에선 일본인 관광객을 위한 사물놀이 공연장이 마련돼 있다. 홍대 놀이터에선 길거리 힙합 공연을 하는 그룹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거리 공연을 하고 있는 주병준씨는 "여기선 나를 보러 온 관객이 아닌 낯선 사람들과 호흡한다. 자연히 그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게 되다 보니 음악적 수준도 더 높아지는 것 같다. '장소파괴'는 우리를 단련시키면서 경쟁력도 높일 수 있게 해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