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출판기념회라는 민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4면

양영유
양영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양영유 논설위원

양영유 논설위원

인산인해였다. 정계·교육계·사회단체 인사와 시민 등 수천 명이 몰렸다.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탈 수도 없어 1층에서 8층까지 인파에 떠밀려 걸어 올라갔다. 책을 사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정가는 1만5000원. 그 액수만 내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현금이 담긴 봉투를 건넸다. 얼마가 들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축사가 시작됐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우리는 실과 바늘과 같은 존재”, 정세균 국회의장은 “서울교육을 위해 잘 써야 할 사람”이라며 주인공을 추어올렸다. 박수가 쏟아졌다. 영락없는 지방 선거 출정식 같았다.

지방선거 출마 후보자들 너도나도 “책 사러 오세요” #사실상 돈 봉투 청구서 … 편법 자금 모금 추방해야

엊그제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열린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의 출판기념회 장면이다. 한 시간 남짓 진행된 행사에서 조 교육감은 재출마를 선언하지는 않았다. 대신 “문재인표 교육개혁 완성에 힘쓰겠다”는 말로 에둘렀다. 출판기념회를 이용해 세(勢)를 과시하며 사실상 재선 행보에 나선 것이다.

평창 겨울올림픽이 끝나고 6·13 지방선거 레이스가 본격화하면서 출판기념회가 봇물이다. 광역·기초단체장, 교육감, 지방의원 출마 예정자들이 너도나도 나선다. 오는 14일까지 전국에서 하루가 멀다고 열린다. 공직선거법상 출판기념회는 선거일 90일 전까지는 횟수와 관계없이 열 수 있어 향후 2주가 절정이다. 그러자 시중엔 ‘2말 3초(2월 말 3월 초)’의 괴로운 계절이 돌아왔다는 우스개가 나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문자·우편으로 시도 때도 없이 날아드는 초대장을 빗댄 것이다.

출마 예정자가 자신의 인생 역정과 행정 비전, 가치관이 담긴 책으로 유권자와 소통하려는 걸 무조건 비판할 일은 아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책을 썼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고, 좋은 홍보 수단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모 기초단체장은 재임 8년 동안 무려 여섯 권을 써 여섯 번 출판기념회를 했다. 그 정도라면 작가로 전업하는 게 나을 듯싶다.

그런데 책이라고 다 책은 아니다. “가장 필요한 책은 가장 많이 생각하게 하는 책”이라는 마크 트웨인의 말처럼 뭔가 울림이 있어야 한다. 교수 출신으로 집필을 많이 했던 조 교육감의 책은 나름 읽을 만은 했다. 하지만 여타 정치인들의 책 중에는 큼지막한 표지 얼굴 사진만 돋보일 뿐 책이라고 할 수 없는 게 부지기수다. 그나마 직접 쓴 것인지도 의문이다.

그런 책을 내놓고 뻔뻔하게 출판기념회를 여는 이유는 뭘까. 인지도 높일 수 있고, 세 과시할 수 있고, 쏠쏠히 선거자금 모을 수 있는 1석 3조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현행법상 출판기념회는 법적인 문제는 없다. 개인 후원금은 정치자금법 규제를 받지만, 책값 명목의 축하금품은 기부 행위로 간주하지 않는다. 수입 내용 자체를 공개할 의무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행사에 보내는 화환만 10만 원 제한이 있을 뿐 책값은 기준 자체가 없다. 그러다 보니 한권에 보통 1만~1만5000원 하는 책을 얼마 주고 사는지 깜깜이다. 사실상의 ‘현금 청구서’나 다름없는 초대장을 받아들고 마지 못해 눈도장 찍으며, 현금 봉투로 ‘보험’ 드는 이들이 한둘이겠는가. 조 교육감 행사장에서도 “얼마를 넣어야 하지”라며 고민하는 말이 들렸다. 대한민국 수도의 교육감인데 “현금과 신용카드로만 정가에 결제합니다”라는 안내문을 내걸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민폐를 끼쳤다.

사실 선거철마다 비판을 받는 출판기념회는 정치권이 규제에 동감해 국회 입법까지 추진했던 사안이다. 하지만 제 밥그릇을 걷어차겠나. 요란만 떨다 묵살하더니 또다시 ‘책 사러 오라’는 청구서를 남발한다. 참다못한 시민단체들이 정가 판매와 현장 구매 권수 제한, 영수증 발급, 내역 공개 등 투명 운동에 나섰다. 제발 그리돼 꼴불견 행사가 추방됐으면 좋겠다. 수도권의 유력 후보자가 제안한 ‘3무(無) 운동’도 좋은 방안이다. 기부금 받지 않기, 선거 펀드 모집하지 않기, 출판기념회 열지 않기다. 그리하면 여기저기 신세 질 일도, 민폐 끼칠 일도 없지 않을까.

양영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