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국가정책을 선거용으로 이용하지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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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그런데 최근 각 당이 지역 순방을 통해 내놓는 공약이란 것들을 살펴보면 국가 경영의 장기적 비전 속에서 심사숙고한 흔적은 없고, 당장 표를 모으기 위해 급조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열린우리당은 실업고 졸업생의 대입 정원 외 입학을 3%에서 10%로 늘리겠다고 약속했다가 대학과 학부모들의 반발에 부딪히자 5%로 줄이겠다고 번복하고, '권고사항'에 불과하다며 발을 뺐다. 선거 때만 되면 들먹이는 호남고속철도 또다시 나왔다. 정동영 의장과 함께 21일 전남을 찾은 강봉균 정책위의장은 전라선 익산~여수 간 KTX를 2010년까지 개통하겠다고 약속했다. 지난 7일에는 충남지역을 방문한 열린우리당 지도부가 논란이 끊이지 않는 호남고속철 '공주역' 신설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고질적 적자로 파업사태까지 불러온 철도사업을 타당성 조사도 없이 정치적 약속으로 덧칠할 일인지 의심스럽다. 집권 여당이 이러면 야당도 질세라 따라할 것이고, 결국은 또다시 온 나라가 민원성 공약들로 뒤덮일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우리는 이미 새만금 문제 등 충분한 국민적 합의를 거치지 못하고 선거에 임박해 내놓은 공약들로 인해 엄청난 국정 혼란과 국력 소모를 겪었다. 무안공항과 김제공항, 울진공항은 사실상 완공하고도 수요 부족으로 개항을 미루고 국민 세금만 쏟아붓고 있다. 공약을 내걸고 당선되면 그만이라는 공약(空約)도 문제지만, 지역민의 표심을 자극하기 위해 국가경영의 전체적인 틀을 무시한 채 내거는 선심성 공약(公約)은 어떤 의미에서 더 큰 문제다. 매니페스토 운동은 꼭 필요하고 지킬 수도 있는 공약을 내걸고 유권자의 심판을 받자는 것임을 각 당 지도부부터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