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게 읽히는 시집들|김현<서울대 교수·문학평론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이성복·황지우·김정환 등의 신인들이 활발하게 시를 발표하고 거기에 상응하여 주목할만한 문학적 활동을 펼쳐 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던 80년대 초에 비해 요즈음에는 그만한 수준의 신인들이 나오고 있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런 느낌은 상대적으로 소설 쪽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현실에서 얻어지는 것일 수도 있고, 상당수의 신인들의 시적 수준이 일정하게 느껴지는데서 얻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주목을 끄는 시집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내가 재미있게 읽은 것은, 김영현 『겨울바다』(풀빛) 이시영 『길은 멀다 친구여』(실천문학사) 고은 『네 눈동자』(창작과 비평사) 이윤택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문학사상사) 김수복 『새를 기다리며』(민음사) 이문재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민음사) 박덕규 『꿈꾸는 보초』(이겨레) 등이다.
그 시집 중에서도, 눈물어린 추억의 세계와 우리에 갖힌 짐승의 세계를 갈등으로서가 아니라 긴장으로써 조화시키려고 애를 쓴 김영현의 시들과, 시에 만화라는 새 요소를 도입하려한 박덕규의 시들은 주목할만하다.
이시영·고은·이윤택 등이 자기 세계를 더 세련되게 보여주려고 애를 쓰고있는 동안, 김영현은 짐승들의 세계가 가냘픔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없는가를 검증하고 있고, 박덕규는 진지하고 순수한 시의 세계에 웃음이라는 비 순수의 요소를 끌어넣으려고 애를 쓰고있다.
나는 시와 만화가 결합될 수도 있으리라고 믿고있지만, 그 경우에, 그 누구의 시가 그 누구의 만화와 다 결합될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다른 매체를 사용하되, 같이 사유하는 사람들끼리 만이 잘 만날 수 있다.
이 달에 발표된 신인들의 시 가운데서는 하재봉의 『푸른 비』(국시·13호)와 기형도의 『죽은 구름』(문예중앙 봄호)이 주목할만하다. 하재봉의 애매모호함 혹은 몽롱함에 대한 취향은 여전해 매우 꼼꼼히 읽어야 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그의 세계관은 한번도 본적이 없는 삶을 찾아다니는 낭만주의적 세계관인데, 그 낭만주의에는 세계를 바꿔보겠다는 열정이 사상되어있어 병적이라 할만하다.
그에 비하면 기형도의 시의 원리는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을, 실존의 덧없음을 주변묘사로 보여준다.
그것이 왜 리얼리즘인가 하면, 이 세계 밖의 어떤 것도 설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며, 그것이 왜 그로테스크한가 하면 그가 묘사하는 것에 따르면 삶 자체가 죽음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더러운 창을 스쳐 지나가는 미치광이 구름과도 같다. 그의 동반자는 고양이나 늙은 개 뿐이다. 그의 그 전언은 끔찍스러운 전언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