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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인생샷] 강제 징집도 불사했던 학보사 전사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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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년 개띠, 내 인생의 다섯컷 ㉘ 조광한 

한국 사회에서 '58년 개띠'는 특별합니다. 신생아 100만명 시대 태어나 늘 경쟁에 내몰렸습니다. 고교 입시 때 평준화, 30살에 88올림픽, 40살에 외환위기, 50살에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고도성장의 단맛도 봤지만, 저성장의 함정도 헤쳐왔습니다. 이제 환갑을 맞아 인생 2막을 여는 58년 개띠. 그들의 오래된 사진첩 속 빛바랜 인생 샷을 통해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봅니다.

지금이야 창경궁이 원래의 지위와 이름을 되찾았지만, 창경원으로 격하됐던 시절엔 원조 놀이공원이었다. 동물원이 있었고, 회전목마 같은 놀이기구도 있었다.

봄이면 벚꽃놀이의 성지. 어느 날 다섯 식구가 창경원에 놀러 갔다. 내가 아직 엄마 품에 안겨있는 걸 보니 군산에서 서울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몹시 어렵게 살던 시절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엄마와 삼 형제의 옷차림이 꼬질꼬질하다. 아버지는 말쑥한 정장 차림이다. 일자리 찾아 동분서주하다가 오셨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손대시는 일마다 왜 그리 안 풀리셨는지. 식구들 꽤 고생했다.

왜들 그리 교련복을 입고 다녔는지. 70년대 고등학교에선 군사 과목인 교련을 배웠고, 군복 대신 교련복을 입었다. 모형 소총으로 총검술을 익혔고, 군인처럼 열병하고 사열을 받았다.

힘찬 목소리로 ‘충성!’ 경례도 했다. 교련 선생은 왜 그리 무서웠던지. 그런데도 교복 대신 교련복을 잘도 입고 다녔다.

그 시절 소풍 가면 교련복과 통기타와 야외전축이 3종 세트. 팝송을 틀고 당시 유행하던 고고 춤을 추며 놀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봄 소풍 가서 한 컷. 친구 통기타로 폼 좀 잡았다.

나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를 다녔고, 학보사 기자로 활동했다. 폭압적이었던 전두환 정권 시절, 각 대학 학보사도 사전검열에 시달렸다. 조금이라도 문제가 될 만한 기사는 인정사정없이 삭제되거나 전면 수정됐다. 기사가 밉보여서 군에 강제 징집된 학보사 기자도 있었다.

그래도 청춘은 직진. 어떻게든 의도한 기사가 실리도록 상상력을 총동원했다. 그 시절 함께했던 외대 학보사 전사들. 나는 태극기 아래 더벅머리에 붉은 상의. 훗날 중앙일보 기자로 일했던 윤석진도 보인다.

‘유권자의 감성을 건드렸다.’ (당시 모 일간지 기사)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생선 팔던 ‘자갈치아지매’ 가 TV에 나와서 낭랑한 부산 억양으로 노무현 후보 지지연설을 하자 선거판이 출렁였다. 대박이었다. 노무현 후보도 감동했다. 유세 도중 내게 전화를 걸 정도였다.

나는 2002년 대선 때 TV 찬조연설을 책임졌다. 나중에 노무현 대통령 부부가 연설했던 분들과 스태프들을 청와대로 초청했다. 대통령 오른쪽이 자갈치아지매 이일순씨, 최종원, 문성근 두 배우도 함께했다.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나다. 이후 나는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 겸 부대변인으로 활동했다.

나는 2004년에 한국가스공사 감사로 임명됐다. 알아야 면장도 하는 법. 가스와 석유에 대해 엄청 공부했고, 현장도 열심히 찾아다녔다. 일단 파고들면 뿌리를 뽑는 성격이라 전문가 못지않은 지식과 경험을 쌓았다. 그리하여 2005년 당당히 한국가스공사를 대표해서 동티모르를 방문했다.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동티모르는 자국 내 가스전 개발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동티모르 독립운동의 영웅이기도 한 사사나 구스마오 대통령과 영부인의 환대를 받았다. 그 자리에서 가스전과 관련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눴다.

사사나 구스마오 대통령은 열정적으로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평생 오로지 동티모르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며 살아왔다. 나는 사사나 구스마오 대통령의 삶에 큰 감명을 받았다. 이후 두어 차례 더 방문하면서 지금까지 친분을 유지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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