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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속으로

오늘의 논점 - 사법부 블랙리스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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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중앙일보 <2018년 1월 25일 30면>
걱정스러운 대법원장의 ‘인적 쇄신’ 방침

QR코드로 보는 관계기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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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수 대법원장이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 조사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김 대법원장은 “법원 구성원의 충격과 분노” “국민들의 배신감”을 언급하며 추가조사위원회가 이틀 전에 발표한 내용을 사실상 실체적 진실로 인정했다. “법관들의 동향을 파악하거나 성향에 따라 분류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된다”며 판사 성향 분류 작업이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 단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법원 내부에서도 이 위원회가 찾아낸 자료를 ‘성향 분류 리스트’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사법행정위원으로 추천할 후보를 선정하는 데 필요한 기초 자료로 볼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김 대법원장은 후속 조치로 법원행정처 조직 개편과 인적 쇄신 조치를 제시했다. 법원행정처의 조직과 기능이 확대되면서 권한이 과도하게 집중되는 부작용이 나타났다는 것은 법조계에서 대체로 동의하는 시각이다. 김 대법원장이 취임 직후 이미 개혁 방침을 밝혔던 부분이기도 하다. 문제는 ‘인적 쇄신’ 부분이다. 진보 성향 판사들이 주도해 만든 국제인권법연구회의 회원들 중심으로 추가조사위원회가 꾸려지자 법원 안팎에서는 법원행정처가 꼬투리 잡힐 만한 내용이 나오면 김 대법원장이 이를 법원 인사에 활용할지 모른다는 관측이 제기됐다. 법원의 ‘신(新)주류’를 형성한 이 연구회 소속 판사들이 법원 내 요직으로 대거 진출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었다. 김 대법원장은 이 모임 회원이었고, 그가 임명한 법원 인사 책임자(인사총괄심의관)도 이 모임에서 활동해 온 판사다.

다음달에 발표될 법관 정기 인사를 앞두고 뛰어난 법리적 판단과 재판 진행 능력을 보여 온 판사 수십 명이 거취를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사법부에서까지 정치적 성향에 따른 요직 등용과 배척이 이뤄질 것이 우려되는 상황과 무관치 않은 일이어서 걱정스럽다.

한겨레 <2018년 1월 26일 23면>
‘블랙리스트’ 논란, 대법관도 법 위에 설 수는 없다

QR코드로 보는 관계기사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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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행정처가 작성한 비밀 문건들이 공개된 뒤 법원과 언론계 등에서 벌어지는 논란은 우리의 눈과 귀를 의심케 한다.

현직 대법관 13명은 23일 간담회를 열어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건 재판이 “사법부 내외부의 누구로부터 어떤 연락도 받은 사실이 없음을 분명히 한다”면서 언론 보도에 대해 “의심과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깊은 우려와 유감”을 표시했다. 그런데 대법관 13명 중 6명은 재판에 관여도 안 했는데 진상을 어떻게 안다는 것인지 우선 의문이다. 당시 주심 대법관이나 대법원장 등 핵심 구실을 한 당사자들은 이미 퇴임했는데 문건 내용이 사실이 아닌지를 누구에게 확인했다는 것인지도 묻고 싶다. 대법관 회의가 동아리 모임도 아닌데 법관·재판의 독립이 걸린 헌법 위반 사안에 대법관 전체의 이름을 그렇게 함부로 내걸어도 되는가. 대법관들의 무책임한 처신에 실망을 금할 수 없다.

일부 보수 언론의 보도 역시 기본적인 언론윤리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물론 문건만으로 권력과의 뒷거래나 법관 사찰이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건 내용만 봐도 실제로 실현됐을 가능성이 농후한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등 보수 언론들은 일제히 ‘블랙리스트는 없었다’며 청와대와 행정처의 부적절한 거래 의혹까지 당연시했다. 법원 내부갈등 문제로 호도하고 거꾸로 대법원 추가조사에 문제가 있었던 것처럼 사건의 본말을 뒤집기도 했다.

법원행정처 정책을 비판한 판사를 선별해 명단을 만들고, 뒷조사해 기록하고, 법적 기구인 사법행정위나 판사회의 간부직에서 배제하는 게 전형적인 ‘블랙리스트’ 아닌가. 대통령의 이해관계가 걸린 사건은 법원행정처가 ‘재판부 의중을 파악’해 청와대에 보고해도 된다고 보는 것인가. 법관·재판의 독립은 물론 국민의 공정한 재판 받을 권리를 심각하게 해치는 헌법 위반 사안이 별문제 아니라고 본다면, 그게 정상적인 언론인가.

문유석 서울동부지법 부장판사는 “문건 자체보다도 우리 사회 일각의 태연자약함이 더 충격적”이라며 ‘우리 사회의 진영 논리는 이 지경에 이른 것인가’라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러나 진영이 문제가 아니라 수구보수 일각의 편향된 시각이 문제일 뿐이다. 모든 사안을 좌우로 나누고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판단하는 기울어진 잣대가 심각한 지경에 이른 것일 뿐이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25일 진상 규명에 미온적이던 법원행정처장을 전격 경질하며 정면돌파 의지를 드러냈다. 당시 대법원장이나 법원행정처장·차장 등 관련자들이 앞으로 컴퓨터 개방에 동의하고 진상 규명에 협조할지가 관건이다. 이미 드러난 문건만으로도 직권남용 혐의는 짙다. 김 대법원장은 전·현직 대법원장·대법관이라고 법 위에 설 수는 없다는 점을 명심하기 바란다.

논리 vs 논리
“사법부 인사마저 정치색에 휘둘릴까 우려” vs “철저히 조사해 진상 밝혀야”

김명수 대법원장은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과 관련해 인적 쇄신 조치를 취했다. 사진은 지난달 출근하는 모습. [뉴시스]

김명수 대법원장은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과 관련해 인적 쇄신 조치를 취했다. 사진은 지난달 출근하는 모습. [뉴시스]

이번에는 사법부다. 전임 정권의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파문에 이어 사법부에서도 블랙리스트 의혹이 터졌다. 지난해 ‘법원행정처 컴퓨터에 비밀번호가 걸린 판사 뒷조사 파일이 있다고 들었다’는 이탄희 판사의 증언에서 시작된 의혹이다. 당시 양승태 대법원장은 자체 조사를 실시했지만 ‘실체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에 판사들은 전국법관대표대회를 열어 재조사를 요구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새로 임명된 김명수 대법원장은 판사들의 요구에 따라 지난해 11월 추가조사위를 구성했다. 그리고 지난 1월22일 민중기 추가조사위원회 위원장은 64일간의 조사를 마치면서 법관의 독립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건을 다수 발견했다고 발표하였다.

법원행정처 심의관 3인의 컴퓨터에서 검색어 입력 방식으로 추출한 문서의 내용을 보면, 현직 법관들을 3가지 글자색으로 나누어 세세한 프로필과 활동내역, 경력 등을 기록한 내용도 있고, 진보성향의 판사들을 핵심그룹과 주변그룹으로 나누어 정리한 파일도 있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댓글 사건 항소심 재판부와 관련해 박근혜 정부의 청와대와 정보를 주고받은 정황이 담긴 파일도 있었다. 삭제된 것을 복구한 300개를 포함하여 총 760개의 파일은 비밀번호를 풀지 못해 확인할 수 없었다고 하니 유사문건이 훨씬 더 늘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밝혀진 내용만으로도 충격에 휩싸인 판사들은 확실한 진상 조사와 재발방지 대책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시민단체들은 범죄행위라고 규탄한 후 양 전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 핵심 관계자들을 검찰에 고발하였다. 국민의 지탄이 높아지고 법원이 검찰의 강제 수사를 받는 사상 초유의 상황이 예고되자, 1월 24일 김명수 대법원장은 ‘셀프 개혁’을 다짐하며 신속하게 후속 조사 약속과 재발방지를 위한 내부 개혁안을 발표하였다.

지난 1월25일, 김 대법원장이 법원행정처장을 김소영 대법관에서 안철상 대법관으로 전격 교체하였다. 법원행정처장은 사법부의 인사와 예산, 사법정책을 총괄하는 자리로 소위 대법원장의 전위대라 불린다는 핵심 요직이다. 대다수 언론은 처장 교체를 두고 김 대법원장이 전날 약속했던 3차 조사와 개혁 조치를 강도 높게 시행하기 위한 첫 단추라고 해석했다. 사법개혁의 신호탄인 만큼 중앙과 한겨레도 사설에서 어지러운 사법부 상황에 대한 우려와 입장을 밝혔다.

우선 한겨레는 긴 지면을 할애하여 대법관 13인이 국정원 댓글 사건 재판에 대해 청와대와의 교신을 집단적으로 부정한 것이나 일부 보수 언론이 ‘블랙리스트는 없었다’고 단정 지으면서 법원 내부갈등으로 치부하는 것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사법권 독립 침해 가능성이 큰데도 묘한 태도를 보이는 법원 내외부의 안이한 시각을 비판한 것이다. 헌법위반, 직권남용에 혐의를 두고 철저히 조사하여 진상을 밝혀야 한다는 것이 한겨레의 일관된 입장으로 보인다.

반면 중앙은 추가조사위원회가 찾아낸 자료가 ‘성향 분류 리스트’에 해당하는가에 의문을 표하면서 실체적 진실로 받아들이기는 유보하는 입장이다. 그리고 김 대법원장의 ‘인적 쇄신’ 작업이 진보성향 판사들을 기용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는 듯하다. 판사의 능력보다 정치적 성향을 더 우선시 할 가능성에 대해 경계하는 이유다.

두 신문의 사설은 향후 전개방향에 대한 우려 안에 각자의 비판과 요구사항을 응축시켜 놓았다. 한겨레의 걱정은 양승태 대법원장이나 대법관, 당시 법원행정처장 등 관련자들이 추가 조사에 잘 협조할 것인가에 있다. 중앙은 진보적 정치 성향을 가진 판사들이 사법부 요직에 등용되는 것을 걱정하고 있다. 한겨레가 요구하는 철저한 조사와 중앙이 요구하는 공정한 인사 모두 사법부의 제도, 조직 개선과 병행되어야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권희정 상명대부속여고 교사· 숭실대 철학과 겸임교수

권희정 상명대부속여고 교사· 숭실대 철학과 겸임교수

우리 헌법은 “사법권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 속한다”(101조 1항)고 하여 일명 ‘법원의 독립’ 조항을 두었다. 헌법이 사법권을 법원에 귀속시킨 이유는 외압을 떨치지 못하면 공정한 판결을 내릴 수 없으므로 외부의 권력기관에 종속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군사독재시절 법원이 무고한 국민을 판결로 괴롭혔던 일을 떠올려보라. 사법부가 행정 권력과 결탁하여 법원 조직의 독립을 지키지 못하고 공정한 재판을 훼손한다면 한겨레의 지적처럼 헌법 위반에 해당한다. 무엇보다 사법부의 본질은 재판에 있고 판결은 판사가 한다. 이번 기회에 법원은 사법권 독립 수호에 충직한 자세를 가진 판사를 등용하여 중앙의 바람대로 정확한 인적 쇄신을 이루기를 바란다.

권희정 상명대부속여고 교사·숭실대 철학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