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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개막식’의 꿈같은 한 장면(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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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기자는 1월 8일자 이 칼럼난에 ‘평창 개막식의 꿈같은 한 장면’이란 제목의 글을 썼는데 사방팔방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칼럼의 메시지는 문재인 대통령이 이명박(MB) 전 대통령을 올림픽 개막식에 초청하면 좋겠다는 제안이었다. “평창의 성공은 남북 대화와 남남 통합의 양 날개가 함께 펴져야 가능하다. 전·현직 대통령의 개막식 등장은 최악의 안보 위기에도 굴하지 않는 한국인의 통합성과 애국심을 상징한다”며 “이명박이 올림픽 개최권을 따냈기에 문재인이 그 열매를 누릴 수 있는 것. 정권이 바뀌어도 국가의 계속성은 유지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칼럼이 나가자 “너 제정신이냐. 감방 갈 X을 두고 무슨 미친 소리냐”는 반말과 욕설, “기레기 박멸하고 중앙일보 폐간하라”는 존재 부정, “너 MB한테 돈 먹었지?”라는 인간 모독까지 특정 집단의 공격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2000개 이상의 댓글이 달라붙었다. 한겨레신문은 필자를 거론하면서까지 “일방적이고 자의적인 논리”라는 비판 기사를 실었고, 대선 때 문재인 캠프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무슨 동화 같은 칼럼을 썼나”라는 조롱조의 반응을 보였다.

문재인의 MB 초청 … 꿈이 현실 되다 #올림픽 성공 국민통합 없이 불가능

결과를 보자면 문재인 대통령은 1월 31일 한병도 정무수석을 이 전 대통령한테 보내 평창 개막식 초청장을 전달했다. 기자의 제안을 문 대통령이 20일 만에 채택한 것이다. 문 대통령은 개인적인 분노를 넘어 선선히 MB의 공(功)과 실적을 인정했다. 한국 정치 풍토에서 드문 일이다. 문 대통령의 소박한 품성과 관용적인 면모라 할 수 있다. 이런 면모가 자주 나타날수록 그의 정치는 확장되고 정치 자산은 커질 것이다. 문 대통령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평창올림픽 유치를 위해 정말 많이 노력했다. 정치적 상황 때문에 개막식 참석까지 못하게 해서야 되겠나”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임기 중 겨울올림픽 평창 유치에 두 번 도전해 실패한 일을 민정수석·비서실장으로서 안타깝게 지켜봤다. 그렇기에 MB의 노고와 분투를 잘 안다. 문 대통령이 자신의 열혈 지지층과 일부 진보 쪽 언론, 충성스러운 캠프 출신들의 감정과 예상을 뛰어넘는 선택을 한 건 1차적으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된 국가 대사를 자기 정파의 힘으로만 치를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올림픽 성공의 요체는 돌발사고를 막고 흥행을 일으키며 국가 도약의 계기를 만드는 일이다. 그 책임은 오롯이 현직 대통령의 어깨에 놓였다. 더구나 문 대통령은 평창을 통해 남북 정상회담과 미·북 평화회담까지 이어 가겠다는 정치적 목표를 품고 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국민 다수의 지지가 없으면 이룰 수 없는 일이다.

청와대에서 평창올림픽을 관리하는 담당자는 김수현 사회수석이다. 적폐청산에 누구보다 집념을 보여 왔던 이념형 참모다. 핵심 참모들도 국민통합 없이 올림픽의 성공이 불가능하다는 현실 인식에 도달했다. 이들은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평창 초청장 대신 검찰 소환장이 발부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고민했다고 한다. 이 전 대통령이 검찰 포토라인에 서서 ‘내가 이러려고 평창을 유치했나’라고 자탄할 경우 MB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동정할 것을 우려했다고 한다.

적폐청산은 한 시대의 정의를 실현하는 가치가 있으나 반작용으로 냉소세력을 광범위하게 형성시켜 온 것도 사실이다. 정치인 문재인은 정의의 가치를 제일로 치지만 대통령 문재인은 국민의 통합을 우선시해야 한다. 문 대통령의 청와대가 적폐청산을 조절하고 국민통합을 강화한 것은 올바르고 현실적인 선택이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