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대하소설 읽는 박근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삶이 평탄했다면 글 쓰지 않았을 겁니다. 인생이 그렇잖아요. 중간중간 불행도 있고…. 인생은 물결 같은 것이거든요.”

1994년 박경리 선생이 26년에 걸쳐 집필한 대하소설 『토지』를 완간하면서 밝힌 소감이다. 전 21권에 원고지 분량만 3만여 장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그는 암 수술을 받고 퇴원한 날도 원고를 쓰고 또 썼다. 책 서문에 “어찌하여 빙벽에 걸린 자일처럼 내 삶은 이토록 팽팽해야만 하는가”라고 썼을 정도다. 『토지』에는 동학농민혁명의 불길이 타올랐던 시기부터 해방까지 격동의 반세기를 살았던 민초들의 생생하고 구체적인 삶이 담겨 있다. 최서희·김길상뿐만 아니라 월선·용이·김환·귀녀 등 소설에 등장하는 600~700명의 인물이 다 주인공이다. 수많은 캐릭터의 생생한 심리 묘사를 위해 저자는 벽에다 커다란 나무처럼 책 줄거리를 그려 넣고 거기에 인물을 배치했다고 한다.

80년대 최대 문제작인 조정래 선생의 『태백산맥』 원고 1만6500장에는 해방 직후 혼돈의 시기를 살아낸 270명의 캐릭터가 살아 숨 쉰다. 작가의 대하소설 3부작인 『아리랑』 『한강』을 포함하면 등장인물은 모두 1200명이나 되지만 이름이 한 명도 안 겹친다. 3부작 원고는 5만3000여 장, 쌓으면 높이가 5m50㎝에 이른다.

대하소설은 박경리의 말처럼 ‘물결 같은 인생’이 모여 큰 강물을 이룬 것이다. 나쁜 사람도 늘 나쁘지는 않고 좋은 사람도 선악의 갈림길에서 고민한다. 대하소설을 읽으면 수많은 군상의 삶을 추체험하면서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살아가는 인생의 복잡다단함을 느낄 수 있다. 대학 신입생 추천도서로 『토지』 등 대하소설이 자주 오르는 이유다. 어휘가 풍부하고 문장이 아름다운 문학 작품을 반복해서 읽으면 글 쓰는 훈련도 된다. 유시민 작가는 글쓰기 연습을 위해 『토지』 1부를 다섯 번 넘게 읽고 『태백산맥』과 황석영의 『장길산』도 여러 번 읽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변호를 맡았던 유영하 변호사의 지난주 본지 인터뷰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이 구치소에서 『토지』를 비롯해 이병주의 『지리산』, 김주영의 『객주』 같은 대하소설을 읽었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보낸 청년기나 80년 이후 18년간의 은둔 시절에 진즉 대하소설을 읽으며 다양한 인생을 접했더라면 어땠을까. 최순실에게 덜 휘둘리고 소통 못 하는 ‘공주’ 이미지도 다소나마 상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적어도 ‘진실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란 단순한 이분법으로 뭇 인간을 감별하는 잘못은 피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서경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