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한 변신 보여줘야 한다|장두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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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의회 정치의 원조임을 자처하는 영국 의회에는 간판이 없다. 국민들은 의사당 건물을 국회라고 부르지 않고 옛 궁성의 이름인 웨스트민스터라고만 부른다. 또 의원들은 금 배지도 달고 있지 않다. 유권자들은 의원들의 유세 때 익힌 얼굴 모습 외에 다른 어떤 징표도 달고 있지 않은 선량들을 금요일마다 찾아가 민의를 전달한다.
그런 외양상의 권위 대신 의사당 뜰에는 왕권에 대항해서 의회의 실질적 권위를 떨쳤던 「크롬웰」의 입상이 버티고 있고 의사당의 어둠침침한 복도에도「처칠」을 비롯한 과거 위대한 의원들의 동상들이 도열해 있다.
영국 의회가 풍기는 권위는 5백여년 동안 쌓여온 의회 정치의 전통을 피부로 느끼게 해주는 그런 기념물에서 나오는 것이다.
40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 국회는 아직은 국회의 간판이나 의원들이 달고 다니는 금배지 외에는 의회정치의 전통을 내세울만한 실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세 차례에 걸친 혹독한 독재에 대항해서 투쟁한 야당 정치인들의 희생을 과소평가 하려는 것은 아니다. 또 오랜만에 대통령직선제를 관철시키고 군사 정권의 모태로부터 문민화·민주화의 씨앗을 끌어낸 과정에서 야당 측 선량들이 맡은 역할은 높이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의 입장에서 볼 때 그런 투쟁의 실적은 충분한 것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두 차례에 걸친 민주화로의 절호의 기회를 두 파벌 사이의 이기적 분쟁 때문에 놓쳐버린 것이 무엇보다도 뼈저린 기억을 남겨 놓았다.
오늘, 13대 국회의원 선거 공고 일을 맞아 이번 선거가 갖는 의미를 음미해 볼 때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은 과거의 실망을 딛고 우리 국회의 권위와 전통이 새 출발하는 출발점으로 이번 선거가 기록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여야 할 것 없이 모두 「새 시대, 새 정치, 새 인물, 새바람」등 과거의 청산과 새 출발을 약속하는 구호들을 내세우고 있는 것은 국민들의 여망을 반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선거 운동이 공식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에 그런 구호와는 반대로 과거의 타락상과 다를 바 없는 행태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모습은 과연 새 출발을 우리가 보고 있느냐는 데 회의를 느끼게 한다.
변혁이란 물론 진공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과거와의 단절이란 정도의 문제지 쾌도난마 같을 수는 없고, 또 그런 것이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민주화로의 개혁이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변혁의 바람은 가속을 잃지 않아야 하고 가속을 더해야 할 주체는 바로 새로 선출될 국회가 되어야한다. 그와 같은 기대감 때문에 이번 선거는 과거와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전개되기를 국민들은 갈망하고있는 것이다. 5·16의 주체 세력이 기성 정치인에 대한 불신을 쿠데타의 주 이유로 삼았었다는 사실을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사람들은 명심해야 된다.
그와 같은 부신이 쿠데타를 정당화시키지는 않지만 그런 평가가 국민들 사이에 넓게 퍼지게 되면 불행한 사태가 재발할 소지가 마련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변혁은 정치적 민주화로 널리 인식되고 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민주주의는 보다 큰 변혁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보다 큰 변혁이란 남들이 1백년의 긴 세월을 두고 이룩한 산업 혁명을 20년 사이에 조급하게 추진한 데서 온 사회 전반에 걸친 변화다. 이 큰 변화가 몰고 온 온갖 사회적 모순과 갈등은 지금까지의 권위주의 체제 속에서 안으로 곪아갔을 뿐 근본적 치유는 시도조차 안된 상태에 있다.
이 과업은 민주화 개혁과 함께 새 국회가 말아야 할 양대 과제인 것이다.
이 엄청난 과제는 지금까지 야당 정치인의 행동 양태를 특징 지운 단선적 대여 투쟁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와 같은 투쟁 일변도와는 구별되는 이념 정당·정책 정당으로 야당이 성장해야되는 단계가 눈앞에 다가왔다. 서구의 각 나라들이 산업 혁명의 후유증으로 혁명, 또는 혁명 일보 전 상태로까지 가는 진통을 겪었던 전례를 보면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변혁의 크기와 깊이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선거 운동 구호에 나타나고 있는 새로움은 이 거대한 변혁에 어떤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느냐는 점을 전제로 할 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새 정치·새 물결 등은 과거 선거에서도 널리 애용되어온 구호들이다. 그러나 그 동안 우리 국회의 활동 내용과 스타일에는 새로운 것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이번 선거에서는 여야 정치인들이 다같이 분명한 변신을 보여주어야 될 것이다. 국민들이 염원하고 있는 민주화를 위해, 그리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산업 혁명의 진통을 무리 없이 해결하기 위해 행동으로 드러나는 변신을 말이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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