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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 4강' 정현은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

중앙일보

입력

"두 아들 중에 한 명은 공부를 시키고 싶었어요. 그런데 여섯 살 때인가, (정)현이가 계속 눈을 찡그려서 안과에 갔죠. 심각하게 눈이 안 좋다고, 시력이 더 나빠질 수도 있다고 했어요. 실명까지 하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의사 선생님이 책은 보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대신 눈이 편안함을 느끼는 초록색을 많이 보여주라고 했어요. 순간 테니스가 떠올랐어요. 초록색 코트, 연두색 공. '이 아이는 테니스를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구나'라고 생각했죠."

 정현의 미소, 한국 테니스 최초 메이저대회 4강!   (멜버른 AP=연합뉴스) 정현이 24일 멜버른에서 열린 호주오픈 테니스대회 남자단식 8강전에서 미국 테니스 샌드그렌를 꺽고 한국 테니스 사상 최초로 메이저 대회 4강전에 진출한 뒤 미소짓고 있다. 2018.1.24   photo@yna.co.kr/2018-01-24 13:48:12/ <저작권자 ⓒ 1980-2018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정현의 미소, 한국 테니스 최초 메이저대회 4강! (멜버른 AP=연합뉴스) 정현이 24일 멜버른에서 열린 호주오픈 테니스대회 남자단식 8강전에서 미국 테니스 샌드그렌를 꺽고 한국 테니스 사상 최초로 메이저 대회 4강전에 진출한 뒤 미소짓고 있다. 2018.1.24 photo@yna.co.kr/2018-01-24 13:48:12/ <저작권자 ⓒ 1980-2018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한국 테니스 사상 최초로 메이저 대회 4강에 오른 정현(22·한국체대)의 어머니 김영미(49)씨 얘기다. 정현은 테니스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아버지 정석진(52) 감독은 삼일공고에서 테니스를 가르쳤고, 형 정홍(25·현대해상)도 실업 테니스 선수다. 온통 테니스를 하는 사람 뿐이라 김씨는 정현에게 라켓을 쥐지 못하게 하려고도 했다. 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여섯 살부터 테니스를 시작했다.

22일 2018 호주오픈 테니스대회 남자단식 16강전에서 노박 조코비치와 맞붙은 정현의 경기를 보고 있는 코치와 가족들. 아래줄 왼쪽부터 손승리 코치, 고드윈 코치. 위쪽 왼쪽 두 번째부터 정현의 형 정홍, 어머니 김영미 씨, 아버지 정석진 씨. [AP=연합뉴스]

22일 2018 호주오픈 테니스대회 남자단식 16강전에서 노박 조코비치와 맞붙은 정현의 경기를 보고 있는 코치와 가족들. 아래줄 왼쪽부터 손승리 코치, 고드윈 코치. 위쪽 왼쪽 두 번째부터 정현의 형 정홍, 어머니 김영미 씨, 아버지 정석진 씨. [AP=연합뉴스]

고도근시에 난시가 심한 정현은 현재 교정 시력이 0.6이다. 운동선수로서는 치명적 약점이고 불편할 수 있지만, 정현은 "안경을 안 쓰면 신경이 쓰인다. 안경은 내 몸의 일부"라고 말한다. 스포츠용 고글을 쓰고 경기를 해 '교수님(professor)'이란 별명도 생겼다. 수술을 권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는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은 수술하지 않을 것이다. 수술 후에 회복이 잘 안 되면 경기를 뛰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

정현 테니스

정현 테니스

테니스 DNA를 가진 정현은 빠르게 기본기를 익혔다. 12세 때 세계적 권위의 국제 주니어대회인 오렌지볼과 에디 허 인터내셔널에서 우승하면서, 12세 이하 세계 1위에 올랐다. 마리야 샤라포바(러시아), 안드레 애거시(미국) 등 세계적 스타를 키운 볼레티어리 IMG 테니스 아카데미에서 배울 기회도 얻었다. 그는 형과 함께 미국으로 테니스 유학을 떠났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주니어 선수들이 다 모여있다보니 꼼꼼한 지도를 받지 못했다. 주원홍 전 대한테니스협회장은 "정현은 기본기가 탄탄한 선수였다. 그런데 미국에 다녀온 다음 폼이 망가져 힘을 제대로 못 썼다"고 했다.

아버지 정석진 감독은 정현을 국내에서 훈련시키기로 했다. 정현은 2012년 이형택이 몸 담았던 삼성증권 테니스팀에 들어갔다. 그 때부터 '정현, 톱10 만들기'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김일순 감독과 윤용일 코치에게 지도를 받으며 정현은 예전 실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당시 윤 코치는 "한국 선수로는 보기 드물게 재능을 갖췄다. 5년 안에 세계 100위 안에 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윔블던 테니스대회 주니어 부문 준우승을 차지한 정현(17, 삼일공고)선수가 (오른쪽) 8일 오후 영종도 인천국제공항으로 입국, 손을 흔들고 있다./2013.7.8/인천공항=이재문기자

윔블던 테니스대회 주니어 부문 준우승을 차지한 정현(17, 삼일공고)선수가 (오른쪽) 8일 오후 영종도 인천국제공항으로 입국, 손을 흔들고 있다./2013.7.8/인천공항=이재문기자

가시적인 성과가 이어졌다. 2013년 윔블던 주니어대회에서 준우승했다. 한국 선수가 윔블던 주니어 대회에서 준우승한 건 1994년 여자부 전미라 이후 19년 만이었다.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선 남자복식 금메달을 땄다. 2015년 챌린저 대회에서 4회 우승하면서 173위이던 세계 랭킹을 50위권까지 끌어올렸다. 남자프로테니스(ATP) 쪽에선 "니시코리 게이(29·일본·24위) 뒤를 이을 아시아 스타가 나타났다"며 주목했다. 정현은 키 1m88㎝·몸무게 87㎏로, 니시코리(1m78㎝·70㎏)보다 체격이 좋다. 아시아 선수는 체구가 작아 파워가 떨어진다. 그래서 지구전 승부를 펼친다. 하지만 서양 선수에게 밀리지 않는 정현은 파워 스트로크로 상대를 제압한다.

정현은 '테니스 지능'이 높다. 책이나 신문을 보는 학구파는 아니다. 쉴 때는 한국 드라마나 예능을 본다. 하지만 테니스에 관한한 어떤 지식이라도 습득하려고 노력한다. 경기 때 안 풀렸던 부분을 일기에 쓰면서 복기하고 또 복기했다. 우상인 노박 조코비치(세르비아) 경기 영상도 수시로 돌려봤다. 코치들이 우스갯소리로 "(정)현이가 질문을 너무 많이 해서 힘들다"고 할 정도였다. 고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면 하루 종일 같은 동작을 수백 번 하는 지독한 연습벌레다. 그를 아는 테니스계 인사들은 "성공은 시간 문제"라고 입을 모았다.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남자복식 금메달을 딴 정현.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남자복식 금메달을 딴 정현.

2016년, 세계 랭킹 100위 이내 선수들이 뛰는 투어 대회에 본격적으로 나가면서 좌절을 맛봤다. 서브와 포핸드샷에서 약점을 보이면서 그해 51위(1월)까지 올랐던 랭킹이 100위 밖(6월)으로 밀려났다. 프랑스오픈에서는 세계 154위였던 캉탱 알리스(21·프랑스)에게 0-3으로 완패했다. 당시 현장에서 경기를 봤던 신순호 명지대 감독은 "서브는 물론 모든 공격에서 흔들리는 모습이 안타까웠다"고 했다.

한국 테니스의 '희망'으로 불렸던 정현은 그 즈음 '실력에 비해 거품이 낀 선수'로 취급당했다. 정현 스스로도 "항상 이기기만 하다가 지는 걸 자주 겪으니 힘들었다. 경기를 뛰면서도 내가 나를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고 했다. 정현은 '투어 중단'이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이제 막 메이저 대회 본선에 나가게 된 선수가 그 기회를 접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현은 "한 번 떨어져 봤으니 다시 올라가면 된다"고 했다.

정현은 2016년 6월부터 4개월간 진천선수촌에서 집중훈련을 했다. 그립부터 서브, 스트로크 등 문제점 전반을 손봤다. 몸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그 지겨운 웨이트 트레이닝도 열심히 했다. 그는 "전에는 서브를 넣거나 공격할 때, 리듬이 없었다. 생각이 많아서 그랬다"며 "공을 띄우고 치는 걸 아무런 생각 없이 반복했다. 그러자 나만의 경쾌한 공격 리듬이 생겼다"고 했다.

생애 처음으로 투어대회에서 우승한 정현. [사진 대한테니스협회]

생애 처음으로 투어대회에서 우승한 정현. [사진 대한테니스협회]

혹독한 슬럼프에서 빠져나온 정현은 날아올랐다. 지난해 4월 바르셀로나 오픈 단식 8강전에서 세계 1위 라파엘 나달(32·스페인)에게 0-2로 졌지만, 1세트를 타이브레이크까지 끌고가는 접전을 펼쳤다. 당시 나달은 "정현은 톱클래스 수준의 백핸드를 가지고 있다"고 칭찬했다. 정현의 백핸드는 각이 크고 정교하다. 베이스라인 근처 깊숙한 곳에 꽂힌다. 약점이던 서브와 포핸드까지 강해진 정현은 지난해 11월 넥스트 제너레이션 파이널스에서 첫 투어대회 우승을 맛봤다.

새해 들어서도 기세를 이어간 정현은 호주오픈에서 세계 14위 노박 조코비치(세르비아), 4위 알렉산더 즈베레프(독일) 등을 격파하며 5연승으로 준결승에 올랐다. 8강전 승리 후 기자회견장에는 40여명의 외신기자가 몰려들었다. 축하 메시지를 하루에 300여개씩 받고 있다. 실시간 검색어는 정현 관련어로 도배됐다.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 중계된 8강전은 460만 명이 봤다. 그래도 정현은 당황하는 모습이 없다. 발랄한 승리 세리머니, 재치있는 인터뷰 답변 등 그 모든 것을 미리 생각하고 하나씩 보여준다. 그의 시선은 더 높은 곳을 향하고 있다. 정현이 "아직 안 끝났습니다. 금요일(26일 준결승전)에 만나요"라고 했던 이유다.

박소영 기자 psy0914@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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