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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분석] 첫발 뗀 규제 완화 … ‘샌드박스’가 문턱 될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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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규제 완화

규제 완화

정부가 규제 시스템에 ‘네거티브 원칙’을 도입하고 규제 샌드박스 관련 입법을 추진하기로 한 데 대해 재계는 23일 일단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38개 혁신 과제 선정해 빗장 풀어 #네거티브 원칙 도입에 재계 환영 #규제 적용 유예시키는 샌드박스에 #포함되는 것 자체가 ‘관문’ 될 우려 #“시스템 갖춰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이번엔 기대가 크다. 재계의 요구가 대부분 반영됐다”는 반응이다. 유환익 전국경제인연합회 산업본부장은 “지금까지 신산업에 대한 현 정부의 정책 방향이 밝혀지지 않았는데 이번에 기업의 애로를 반영해 정책 방향을 밝혔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말했다. 재계의 다른 관계자는 “구체적인 조치가 나온 데다 공무원들이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도록 ‘사후 감사에 불이익이 없다’는 언급도 들어 있어 매우 고무적”이라고 말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재계는 정부가 22일 발표한 규제혁신 내용을 ‘크게 3단계에 걸쳐 규제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우선은 큰 원칙이 ‘금지되지 않은 사업은 도전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네거티브 규제 도입은 그간 재계가 줄기차게 도입을 요구해왔으나 정부 차원에서 도입 의사를 밝힌 적은 없었다. 최근 대한상의는 상의를 방문한 더불어민주당 지도부에 재계의 의견을 모아 6개 건의사항을 전달했는데 그중 첫 번째 항목이 바로 네거티브 규제 도입이었다. 재계 관계자는 “네거티브 규제를 하겠다는 큰 원칙만으로도 새로운 사업에 도전할 분위기가 조성될 것”이라고 말했다.

두 번째는 38개의 혁신 과제를 구체적으로 적시하면서 규제를 푼 것이다. 예를 들면, 그간 선박에 연료를 공급하는 사업은 ‘선박급유업’으로 규정돼 있어 LNG나 전기 같은 에너지를 선박에 공급하는 사업이 불가능했는데 이번에 풀렸다. 업계에서는 LNG 연료를 선박에 공급하는 것만으로도 연간 4억5000만 달러의 시장이 창출될 것으로 전망한다.

마지막 단계는 규제 샌드박스 도입이다. 규제 샌드박스는 신산업·신기술 제품이나 서비스를 내놓을 때 일정 기간 기존 규제 적용을 유예시켜 주는 제도다. 이번에 38건에 포함되지 않은 신사업들이 이를 활용하면 도전할 길이 열린다. 한동희 국무조정실 규제기획과제과 과장은 “네거티브 원칙을 도입하기로 했지만 모든 산업에 한 번에 적용할 수는 없어서 업계의 의견을 들어 38건을 우선 도입한 것”이라며 “제외된 신산업은 규제 샌드박스에 포함해 달라고 신청하면 정부에서 시범 사업을 해볼 수 있도록 검토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규제 샌드박스는 ▶정보통신기술(ICT) 분야 정보통신융합법 ▶핀테크 분야 금융혁신지원법 등 4개 법률안으로 마련된다. 다음달 국회에서 곧바로 논의를 시작한다. 4개의 신설 법안 외에 기존에 있는 규제 법안에 샌드박스를 신설하는 것도 가능하다. 지사향 국무조정실 규제기획과제과 사무관은 “금융기관의 고객 정보를 중소형 핀테크 업체들도 활용하는 방안의 경우 기존의 금융혁신특별법에 샌드박스를 신설함으로써 허용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ICT 업계 일각에서는 네거티브 규제 원칙이 기업에 어떻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도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한 핀테크 업체 최고경영자(CEO)는 “앞으로 어떤 기술이나 서비스를 내놓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 건지 모호하다”며 “어떤 서비스나 기술 분야에 규제 샌드박스를 만들지 선별한다고 하면 결국 정부의 규제 관문은 여전한 것이고, 기존 사업자들의 이해 관계가 더 많이 반영될 가능성도 큰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샌드박스에 포함되는 것 자체가 관문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논란이 됐던 카셰어링 서비스도 이번에 규제 완화에 포함되지 않았다. 한동희 과장은 “시장 관계자들의 이해가 부닥쳐 제외됐으나 향후 업계에서 규제 샌드박스 포함 요청이 오면 본격적으로 검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역대 정부의 규제 완화 정책이 용두사미로 끝났다는 측면에서 의구심을 보이는 시각도 있다. 재계에선 그래서 이번 규제 완화책 발표가 일회성 이벤트에 그쳐선 안 된다는 주문을 한다. 유환익 본부장은 “일본이나 미국은 규제 개혁을 추진할 때 이걸 앞으로 어떻게 법제화할 건지 추진 계획을 구체적으로 밝힌다”며 “정권이 바뀌거나 담당 공무원이 바뀌어도 규제 개혁이 지속적으로 추진될 수 있도록 규제 개혁 시스템을 갖추는 일이 뒤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박태희 기자 adonis55@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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