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골프공 맞은 이 총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3면

노무현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명한 이해찬총리가 14일 서울 세종로 정부 중앙청사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신인섭 기자

이해찬 국무총리가 끝내 '3.1절 골프 로비' 파문으로 낙마했다. 이 총리는 직설적 성격과 거침 없는 말투로 여러 번 구설수에 올랐다. 골프 파문이 있기 하루 전인 2월 28일에도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과 설전을 벌였다. 여당에서조차 "분위기나 여론을 고려해 총리가 한 발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음날인 3월 1일엔 부산 상공인들과 골프를 쳤다. 철도 파업 첫날이라 비판 여론이 비등했지만 그는 "파업 대책을 세워놓았다"고 비켜갔다.

지나친 자신감과 견제받지 않는 막강한 권력 행사. 이런 비판에 이 총리는 '일과 사생활은 별개'라는 논리로 대응해 왔다. 언론 인터뷰에서 그는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라고 하지만 수신은 수신이고 평천하는 평천하지 그걸 왜 연관시키느냐"고 했다.

실세총리, 권력의 제2인자라는 권부에서 그를 하루아침에 추락하게 한 골프 파문도 이런 오만과 잘못된 공직관과 무관치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 골프 파문으로 낙마한 실세총리=이 총리의 지나친 자신감은 노무현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고건 전 총리의 바통을 받아 2004년 36대 총리에 취임했다. 김종필 전 총리(11대 총리 취임 시 45세)에 이어 둘째로 젊은 총리(취임 시 52세)였다.

그는 5선의 관록과 행정경험을 바탕으로 해묵은 갈등 과제를 해결하고 여당과의 정책조율을 주도했다. 방폐장 부지 선정, 행정도시 이전과 176개 공공기관의 지방 이전 같은 굵직한 과제를 해결하는 수완을 발휘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에겐 실세총리.책임총리란 말이 따라다녔다. 하지만 거침 없는 말투와 직설적 성격은 야당과의 마찰을 부르며 정국의 파란을 불렀다. 그는 한나라당을 '차떼기당'이라고 해 국회 파행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여야 정치권의 사퇴압박 속에 상처를 입고 국정의 중심무대에서 내려오게 된 이 총리는 당으로 복귀한 뒤에도 당분간 특별한 역할을 맡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일부에선 지방선거 뒤 개헌 문제 등을 놓고 정치권이 소용돌이 칠 때 새롭게 정치적 목소리를 내기 시작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이 경우에도 그의 정치 행보는 "나와 천생연분"이라고 극찬한 노 대통령과의 교감을 전제로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는 게 대체적인 전망이다.

◆ 운동권 출신에서 총리로=정부 수립 이후 지금까지의 총리 중 이 총리만큼 숱한 진기록을 남긴 사람은 많지 않다. 우선 그는 재야 운동권 출신에서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에 오른 최초의 총리다. 청년 시절 그는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뛰어들었다.

서울대 사회학과 재학 중이던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열린우리당 김근태 최고위원 등과 같이 투옥됐고 80년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이후 민청련.민주통일국민회의 등 재야운동권에 몸담다 36세 때인 88년 정계에 입문했다. 서울 관악을에서 당선된 이래 이곳에서 내리 5선을 했다. 13대 때는 노무현 대통령, 이상수 노동부 장관 등과 함께 국회 '노동위 3총사'로 이름을 날렸다.

1988년 광주 청문회에선 스타로 떠올랐다. 95년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맡아 행정경험을 쌓았다. 국민의 정부에선 교육부 장관을 맡아 교원정년 단축 등 교육개혁을 밀어붙여 교육계의 반발을 샀다. 학력 저하 논란에 휩싸이면서 '이해찬 세대'라는 신조어를 낳기도 했다.

그는 선거기획통으로도 통했다. 총선기획단장(95년)에 이어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후보 선대위 기획본부장을 맡아 정권 창출의 일등공신이 됐다.

이정민 기자 <jmlee@joongang,co,kr>
사진=신인섭 기자 <shinis@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