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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불구 "한국문학사" 복원 첫걸음|정지요·김기림 작품 해금의 배경과 의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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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분단이데올로기로 인해 매장되었던 소중한 문학유산 한 부분이 돌아왔다. 문공부는 지난달 31일 30년대 문단의 두 기둥이었던 납북천재시인 정지용·김기림의 작품을 납북 38년만에「공식해금」함으로써 40여 년간 불구상태로 방치돼온「공백의 문학사」가 분단상처를 치유하고 그 참모습을 복원하는 첫 걸음을 내딛게 했다.

<해금의 의미>
「한국현대시의 아버지」로 불릴 만큼 우리 문학사에 공헌했으면서도 불분명한「월북 설」 에 휘말려 40년 가까이 작품은 물론 이름조차 제대로 표기될 수 없었던 이들 두 문인에 대한 해금은 78년 정부의「연구개방원칙」시사이래 문단 및 학계·유가족·매스컴 등의 거듭된 해금촉구가 이어진지 10년만에 실현됐다.
특히 이들은 북한에서조차「자본주의 퇴폐반동작가」로 규정, 남북한 모두에게서 배척 당함으로써 이른바「휴전선문인」이라는 서글픈 대접을 받아왔다.
따라서 뒤늦게 이루어진 이번 조치는 문학을 이데올로기로 단죄해온 정부가 우리문학사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에 있어 북한보다 먼저 주도권을 행사하겠다는 의지표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는 문공부가 지용·기림 외에 나머지 납·월북문인들의 작품도 단계적으로 해금하겠다는 개방적「공약」을 덧붙었다는 사실에서도 뒷받침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조치는 정부의「해금단행」이라는 적극적 태도보다는「해금인정」이라는 소극적 태도에 불과하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지난1월 깊은샘 출판사의『정지용의 시와 산문』이 문공부의 납본 필증을 받은 것을 계기로『실질적 해금이다』(출판계),『출판사실 확인에 불과하다』(문공부)는 등 해금규정공방전이 계속돼오면서 시중에는 이미『정지용 전집』(민음사)『김기림 전집』(심설당)등이 해금과 무관하게 잇달아 출간됐다. 따라서 정부도 더 이상 지용·기림을 규제할 명분을 찾기 어려웠다.
이와 관련, 정부의 이번 조치는 이미 학계에서는 재평가작업이 마무리에 들어간 지용·기림 두 시인에만 해금을 국한시켰다는 점에서 우리문학사 복원작업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비판도 일고 있다. 현재 1백2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는 납·월북문인 중 이번 검토대상에 포함됐던 이태준·박태원·안회남·백석·오장환 등 26명 전원만큼은 조속한 시일 내에 해금해야 한다는 것이 문단 및 학계의 한결같은 바람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 미술계에서도 추진중인 납·월북 화가 해금문제를 비롯해, 모든 학·예술분야의 납·월북인의 순수창작물을 해금해야 한다는 견해도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러나 이처럼 두 시인의 해금이「상징적 효과」에 치우친 감이 있다하더라도 앞으로의 우리문학사 복원작업을 위한 숨통을 텄다는 점, 청소년들이 애송할 수 있도록 교과서에 이들의 시가 실릴 수도 있게 됐다는 점등은 지용·기림 유가족들의 기쁨 못지 않게 큰 것이다. 또 두 시인의 해금으로 인해 최근 활발해지기 시작한 월북작가 연구가 더욱 확대·심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생애와 문학>
두 시인의 공통점은 먼저 이들의 작품이 사상성과는 거리가 먼 순수문학의 본령을 지키고있다는데 모아진다. 1902년 충북 옥천 출생인 지용은『정지용만큼 우리말을 아름답게 갈고 다듬을 줄 아는 시인은 없다』는 평가가 현재까지 유효할 만큼 우리 현대시 전역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30∼40년대 대표적 서정시인이다.
당시 모더니즘을 우리고유의 향토적 정서 속에 흡수,『정지용 시집』(35년)『백록담』(41년) 등의 주옥같은 시집을 남겼다.
1908년 함북 학성 생인 기림은 30년대 탁월한 모더니스트시인이자 이론가로서 지용과 함께 문명을 떨쳤다. 영미이미지즘과 주지주의를 시단에 본격적으로 소개한 문학이론가로서 당시 프로문학의 경직성을 강렬히 비판하기도한 그는『기상도』(36년)『바다와 나비』(46년)등 다수의 시집과 시론집을 남겼다.<기형도 기자>

<아버지 해금탄원이 나의 지난10년 삶의 전부-정지용 장남 구관씨>
『한을 풀지 못하고 돌아가신 어머님이 살아 계셨더라면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지난 10년간은 아버님의 납북자료수집 및 해금탄원을 위해 뛰어다닌 것이 제 삶의 전부였습니다.』
정지용의 장남 구관씨(60·인천시 효성동)는 38년 동안 그토록 기다려왔던 완전 해금이 이루어지자 눈시울을 붉혔다.
『53년쯤인가 충청도에서 피난살이를 할 때 아버님의 시가 교과서에서 사라지고 이름도 정○용 등으로 표기되는 것을 보고 월북누명을 쓰게된 사실을 알았지요.』정씨는 부친의 해금이 우리문학사의 복원을 이루는 계기가 되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38년만에 누명 벗어…어머니와 기쁨의 오열-김기림 장남 세환씨>
『지난2월 아버님의 전집이 출간됐을 때는 정부의 공식해금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여서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버님이 완전히 명예를 회복하셨습니다.』 김기림의 장남 세환씨(56·서울 은평구 증산동)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 김원자 여사(76)를 끌어안고 기쁨의 오열을 터뜨렸다.
38년간 쌓인 한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50년 6월 28일 곧 돌아오겠다며 외출하시던 아버님의 마지막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이제 아버님이 월북의 누명을 벗었으니 여한이 없습니다.』
김씨는 지난 10년간 부친의 해금탄원을 함께 해준 문단·학계·매스컴에 깊이 감사드린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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