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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 아니면 쇼나 하라고?” 뿔난 아이스하키팀 엄마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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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하키맘'이 보낸 편지

저희는 이제까지 항상 '우리들만의 리그'를 해왔습니다. 작년 2월 삿포로 아시안게임때도 4월 강릉세계선수권 우승때도 그랬고 정규 방송중계도 없었고, 응원단도 항상 국가대표 부모님들 외에 일부 관심팬들 뿐이고..그래도 꿈이 있어 좋았고 경기때마다 가슴설레고 행복했습니다. 평창올림픽도 1승이 목표지만 마지막일지도 모를 올림픽 무대에서 '지더라도 재미있는 경기였다'는 소리만 나오면 좋겠다는 소박한 꿈이 전부였습니다.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합의 #“메달권 아닌데” 이낙연 발언에 분노 #“힘빠진 선수 모습 보기 안타까워”

대통령이 어제 진천에서 비인기 종목의 설움을 벗을수 있는 계기가 될거라 말했지만 그 관심은 북한에 대한 관심이며 평창 이후에는 다시 '우리들만의 리그'로 돌아갈거라는 예감을 하고 있기에 마음이 착찹합니다. 채린이는 아이스하키를 참 좋아합니다. 7살때 시작해서 하키라는 단체운동을 통해서 진짜 많이 배우고 건강하게 성장해왔습니다.그래서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구요.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우리들만의 리그'로 돌아갈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아이의 열정과 꿈을 계속 응원해줄 생각입니다.

2018년 1월 18일 박채린 엄마 이은영.

평창올림픽 여자아이스하키 남북한 단일팀 논란을 지켜보는 선수 부모들의 마음도 불편하다. 어려운 상황을 견디며 평창올림픽 출전 하나만 바라봤던 딸들이 혹시라도 경기에 나서지 못할까 우려해서다. 사진은 지난해 4월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한 직후 선수들과 그 가족들이 함께 찍은 기념사진. [사진 이은영씨]

평창올림픽 여자아이스하키 남북한 단일팀 논란을 지켜보는 선수 부모들의 마음도 불편하다. 어려운 상황을 견디며 평창올림픽 출전 하나만 바라봤던 딸들이 혹시라도 경기에 나서지 못할까 우려해서다. 사진은 지난해 4월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한 직후 선수들과 그 가족들이 함께 찍은 기념사진. [사진 이은영씨]

한국 여자아이스하키 대표팀 디펜스 박채린(20)의 어머니 이은영(50)씨는 남북 단일팀 논란이 답답하기만 하다. 남북은 지난 17일 차관급 실무회담에서 여자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에 합의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20일 스위스 로잔에서 열리는 ‘평창 회의’에서 결정된다. 10년 넘게 올림픽만 바라봤던 선수들은 영문도 모른 채 갑작스럽게 결정된 단일팀 합의 소식에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이를 바라보는 선수 부모들의 마음도 편치 않다.

이은영씨는 17일 “화가 나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안타까울 따름”이라고 했다. 지난해 6월 남북 단일팀 구성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 나왔을 때 여자아이스하키 선수들과 부모들은 분노했다. 부모들이 뜻을 모아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청원 게시판에 글을 남기기도 했다.

그런데 평창올림픽을 불과 한 달도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다시 단일팀 구성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선수 부모 전부가 모인 메신저 단체방이 난리가 났다. 일부는 '1인 시위라도 해야하는 것 아니냐'고 나섰다. 하지만 상황이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다보니 별다른 대응을 할 수 없었다. 부모들은 “(여자아이스하키가) 메달권이 아닌데…”라고 말한 이낙연 국무총리의 발언에 크게 상심했다고 밝혔다. 이씨는 “어차피 1등을 못하는 선수들이니까 북한 선수들하고 같이 뛰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정치적인 쇼나 하라는 말인지도 모르겠다”며 “올림픽에서 1승을 하는 게 선수와 부모들 모두의 목표였는데, 갑자기 희망이 사라진 기분”이라고 밝혔다.

7살 때 아이스하키 스틱을 처음 잡은 박채린은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국가대표에 발탁됐다. 2015년에는 유망주로 선정돼 대한아이스하키협회의 지원을 받아 캐나다 하키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대표팀에는 없어선 안될 주축 수비수로 성장했다.

이씨는 “아직 구체적인 내용이 나오지 않았지만 결국 누군가는 피해를 보게 될 것”이라며 “정치권은 올림픽을 단순한 이벤트로 생각하는 것 같다”고 했다. 이어 이씨는 "어제(17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선수들이 만난 자리에서 수당 문제, 대학 진학 문제, 실업팀 창단 문제 등에 대한 의견을 듣고 갔다고 하더라. 그런데 쉽게 바뀌진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2017 IIHF 여자 아이스하키 세계선수권대회 디비전 II 그룹A 한국과 슬로베니아 경기가 2일 관동하키센터에서 열렸다. 한도희가 슛을 막을 준비를 하고 있다. 강릉=임현동 기자 /20170402

2017 IIHF 여자 아이스하키 세계선수권대회 디비전 II 그룹A 한국과 슬로베니아 경기가 2일 관동하키센터에서 열렸다. 한도희가 슛을 막을 준비를 하고 있다. 강릉=임현동 기자 /20170402

대표팀 골리 한도희(24)의 어머니 우희준(52)씨는 “대통령이 하라는데 아이들이 어떻게 반대할 수 있겠는가. 애들만 불쌍하다”고 했다. 11세 때 처음 태극마크를 단 한도희는 13년째 대표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주전 골리 신소정(28)에게 밀려 13년 동안 10경기도 뛰지 못했다. 지난해 4월 강릉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서는 신소정의 부상으로 모처럼 기회를 잡았다. 한도희는 4경기에서 3실점하며 한국의 우승을 이끌었고, 대회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됐다.

우씨는 "4월 대회 때 딸이 선발로 나갈 것 같다고 해서 가족들과 강릉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 경기에 못 나갈 것 같다고 해서 평창에서 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와 TV로 경기를 본적이 있다"며 "잘하는 모습을 보니 기특해서 혼났다. 도희도 '13년 한이 다 풀렸다'고 하더라"며 웃었다. 이어 우씨는 "힘들었을 텐데 전혀 내색하지 않고 잘 이겨냈다. 올림픽에서 한 경기라도 뛰고 싶다는데 꼭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017 IIHF 여자 아이스하키 세계선수권대회 디비전 II 그룹A 한국과 슬로베니아 경기가 2일 관동하키센터에서 열렸다. 한수진이 드리블하고 있다. 강릉=임현동 기자 /20170402

2017 IIHF 여자 아이스하키 세계선수권대회 디비전 II 그룹A 한국과 슬로베니아 경기가 2일 관동하키센터에서 열렸다. 한수진이 드리블하고 있다. 강릉=임현동 기자 /20170402

대표팀의 맏언니 한수진(30)의 어머니 조효상(61)씨는 "대표팀에 모인 아이들은 아픔을 하나씩은 갖고 있다. 갑작스러운 단일팀 추진 소식에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지금은 열심히 운동하라고 조언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했다.

한수진은 연세대 기악과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조씨는 "(한)수진이는 어릴 적 피아노 밖에 몰랐던 아이"라며 "고3 때 갑자기 아이스하키 하겠다고 해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조씨는 크게 반대했지만 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조씨는 "딸이 묵묵히 자기 길을 걷더라. 훈련일지를 10년 넘게 쓰고있다. 휴가때도 선수촌에 혼자가서 훈련할 정도로 의지가 강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4월 세계선수권에서 응원하고 있는 여자아이스하키 선수 가족들. [사진 이은영씨]

지난해 4월 세계선수권에서 응원하고 있는 여자아이스하키 선수 가족들. [사진 이은영씨]

한수진은 2011년 아이스하키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 홀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만두 빚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일본 클럽팀 선수로 활약했다. 조씨는 "수진이가 평창올림픽 개최 소식을 일본에서 듣고 기뻐서 펑펑 울었다더라. 막상 올림픽을 앞두고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니까 더 안타까운 것 같다. 당시 같이 운동하던 언니들이 다 그만둬 대표팀 맏언니가 됐다. 이제 책임감이 든다고 하더라"고 했다.

어머니는 딸이 평창올림픽까지만 선수로 뛰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조씨는 "수진이는 여자아이스하키도 나중에 축구나 핸드볼처럼 팀이 많아지고 올림픽에 자주 나갈 수 있게 될 거라 생각한다"며 "제대로 된 여자아이스하키 팀이 생기는 게 아이들의 유일한 바람"이라고 말했다.

김원 기자 kim.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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