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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핵심기업 지킬 'M&A방패' 있는데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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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국내 기업들은 외국인의 적대적 M&A(인수합병) 공격을 받아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다. 경영권 방어 제도가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은 나라에서 글로벌 스탠더드를 얘기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건국대 권종호 교수)

"국가마다 사정이 달라 M&A와 관련한 글로벌 스탠더드란 없다고 보는 게 맞다." (LG경제연구원 조영무 박사)

한덕수 재정경제부 장관 겸 경제부총리가 최근 내세운 '글로벌 스탠더드론'이 일부 M&A 전문가들의 도마 위에 올랐다. 한 부총리는 지난 9일 정례브리핑에서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5% 규칙(주식대량보유 공시제도)등을 마련해놓고 있으며, 더 이상 채택할 만한 방어책은 없다"며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는 경영권방어 장치는 전혀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잘라 말했었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M&A방어책은 다 만들어져 있고, 더 이상 만들라는 주문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는 시각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M&A전문가들은 오히려 한 부총리가 '글로벌 스탠더드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꼬집었다. 한국 만큼 M&A공격에 방어하기 어려운 나라는 드물다는 것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승철 상무는 "우량 기업들이 외국자본에게 다 넘어가는 게 글로벌 스탠더드인가"라고 반문하면서 "미국과 유럽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방어제도를 도입하자는 게 왜 글로벌 스탠더드와 맞지 않는 것인지 이해가 안된다"고 지적했다.

선진국들은 방어망 탄탄= 독일 에너지 대기업인 에온((E.On)이 지난 달 21일 스페인의 최대 전력회사인 엔데사를 인수할 뜻을 밝히자 스페인이 발칵 뒤집어졌다. 스페인 정.재계는 한목소리로 반대했다. 스페인 정부는 결국 외국기업의 M&A 규제를 보다 강화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독일 정부는 "이같은 규제는 시장원리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에 제소하겠다"라고 밝혀 두 나라는 날 선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그러나 스페인 정부가 반대하는 한 에온은 엔데사를 사 들일 수 없다. 스페인 정부가 엔데사의 황금주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황금주란 인수합병 등의 주요 의사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주식을 말한다.

유럽은 전통적으로 M&A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M&A를 시도하는 공격자의 발을 묶어 놓는다. 독일 역시 일정 지분 이상의 주식을 취득하면 나머지 주식 모두를 높은 값에 사들여야 한다는 의무공개 매수제를 만들어 놓는 등 벽을 높게 쌓아뒀다. 프랑스는 진작부터 외국인 투자 사전심사제를 시행중이다. 공공질서.보건.안보 등에 영향을 주는 외국인 투자는 프랑스 정부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한다. 설사 승인이 났어도 투자 철회를 명령할 수 있는 권한도 있다. 이처럼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외국인 투자에 대한 심사나 인가 권한을 모두 갖고 있다. M&A가 비교적 자유로운 미국도 '엑손-플로리오법'이란 장치를 통해 외국인 투자를 사전심사하고 있다. 이 법에 따라 미국은 자국의 안보를 위협할 투자라고 판단 되면 대통령이 조사를 지시하고, 외국인 투자를 돌려 세울수 있다. SK경영경제연구소 왕윤종 상무는 "국가안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외국인 투자에 한정한다고 하지만 '국가 안보'란 개념이 모호해 첨단기술 및 에너지산업등 주요 전략산업엔 대부분 적용할 수 있다"면서 "우리도 외환위기 이전엔 외국인 투자를 사전 심사할 수 있었지만 이후 이 규제를 없애 버렸다"고 밝혔다.

또 다른 M&A전문가는 "한 부총리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아메리칸 스탠더드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면서 "미국도 기업들이 손쉽게 방어할 수 있는 제도를 운영 중"이라고 지적했다. 포드사는 기존주주들이 7%의 주식 지분으로 40%에 해당하는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차등의결권 주식을 갖고 있다. 구글과 펩시.나이키 등을 포함, 200개 정도의 미국 상장기업들이 이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세계 최우량기업인 GE 등 수많은 미 기업들은 M&A 공격을 받으면 기존의 우호주주에게 매우 싼 가격으로 신주를 발행하는 독약처방(포이즌 필)도 할 수 있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방어수단은 없나= 국내 기업이 현행 법 테두리 안에서 동원할 수 있는 방어수단으로는 자사주 취득과 초다수 의결제, 황금 낙하산 제도 등이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제도를 쓰는 데는 한계가 있다. 대표이사나 임원을 해임하는 데 필요한 결의 요건을 까다롭게 만드는 초다수 의결제와, 대표 및 임원이 강제로 쫓겨날 경우 이들에게 거액의 보상금을 지급하도록 하는 황금 낙하산 제도는 우량 대기업들에겐 그림의 떡이다.

이 제도를 도입하려면 주주총회에서 절반 이상의 주주들이 찬성해야 하는 특별결의를 통과해야 한다. 그러나 우량 대기업들의 경우 외국인 지분율이 50%를 넘어 특별결의를 할 여력이 없다. LG경제연구원 조 박사는 " 경영권 방어가 절실한 기업들은 우량 대기업들"이라며 "우량 대기업들은 이 수단을 쓰고 싶어도 정관을 바꿀 수 없어 사용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초다수의결제 등을 채택한 기업들은 대부분 벤처기업이나 신규 상장기업이고 우량 대기업은 하나도 없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전경련 양금승 부장은 "현재 우리 기업들이 쓸 수 있는 방어책은 사실상 자사주 밖에 없다"고 잘라 말한다. 기업 스스로 발행한 주식을 되사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양 부장은 "자사주는 의결권이 제한돼 있어 경영권 방어를 오히려 어렵게 하는 데다 보유 비용도 적지 않다"며 "자사주 취득은 엄격히 제한하고 대신 다른 경영권 방어책이 도입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외국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방어수단 중 한국에 없는 것도 있다. 독약처방과 차등 의결권 주식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이런 제도를 도입한다고 해도, 기업이 사용하려면 역시 정관을 변경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황인학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조정실장은 "초다수 의결제 등 정관을 변경해야 도입할 수 있는 방어수단의 경우 외국에선 특별결의가 아닌 보통결의를 통과하면 채택할 수 있도록 돼 있다"며 "우리도 주총의 보통결의를 통과하면 방어 수단을 도입할 수 있도록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보통결의는 대략 주주 30%가 찬성하면 된다. 이밖에 증자시 신주를 제3자에게 배정할 수 있는 신주 배정제도의 요건을 완화하고 의무공개매수제, 외국인 투자 사전심사제 등도 검토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김영욱 전문기자

황금 낙하산=적대적 M&A로 경영진이 실직할 경우 인수 기업은 막대한 퇴직금을 지급하도록 하는 것.

황금주=기업의 주요 의사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주식.

독약처방(포이즌 필)=M&A 공격을 받으면 해당기업 주식을 기존 주주들에게 시가보다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는 매수권을 제공하는 것.

초다수의결제=경영권이 변하는 사항인 경우 법에서 정한 요건보다 훨씬 강화된 의결 요건을 갖추도록 하는 제도.

차등의결권제=주당 의결권을 달리 부여하는 제도



계열사간 출자 무너져 경영안보 비상
일본은 ‘신회사법’ 만들어 방패 확보

일본이 적대적 M&A에 대한 방어벽을 높게 쌓고 있다. 한국 못지 않게 무방비였던 일본은 기업들이 여러 방어수단을 쓸 수 있도록 관련 제도를 뜯어 고쳤다.

지난해 6월 일본은 이른바 신회사법으로 불리는 '회사법제 현대화법'(회사법)을 제정했다. 이에 따라 일본기업들은 M&A 위기때 독약처방과 황금주,차등 의결권주식등 각종 방어책을 활용할 수 있게 됐다.

일본 기업들은 그동안 한국처럼 계열사간 출자로 M&A위협에 대응해왔다. 그러나 일본기업들은 '10년 불황'을 거치면서 이런 출자구조가 무너지자 '경영안보'에 비상을 걸었다. 물론 일본은 드러내놓고 독약처방 등을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회사법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기업들은 얼마든지 M&A 방어에 나설수 있다.

우선 우호 주주에게 신주를 팔 수 있는 신주예약권제도를 도입했다. 또 주식 종류도 다양화해 회사가 정해진 가격에 주식을 강제로 되살 수 있는 취득조건부 주식도 발행할 수 있게 했다. 이렇게 되면 기업들은 유사시 독약처방이란 방어 수단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가령 우호주주들과 미리 강제 취득조건이 붙은 신주예약권 발행을 약정해놓으면, M&A 공격을 받을 때 시세보다 훨씬 싼 값에 신주를 발행할 수 있다. 이후 M&A위협이 사라지면 기업이 주식을 강제로 매수해 소각할 수 있다. 특히 일본은 이사회 결의만으로 이 수단을 사용할 수 있도록 조건을 완화했다.

또 일본 기업들이 발행할 수 있는 주식 종류를 다양화해 차등 의결권제도를 시행할 수 있도록 했다. 양도를 제한하는 주식, 강제로 되살 수 있는 주식, 의결권을 제한하는 주식 등을 발행할 수 있다. 투자자 입장에선 상품이 다양해져 좋고, 기업 입장에선 자금조달 수단이 많아져 좋다. 기업들은 또 이를 활용해 우호 주주에게는 1주를 1의결권으로 하는 주식을, 그외 주주에게는 100주를 1의결권으로 하는 주식을 발행할 수 있다.

권종호 교수는 "일본은 한국만큼 외국인의 M&A공격이 현실화되고 있지 않는데도 정.재계가 머리를 맞대고 대비책을 철저히 마련했다"며 "한국에선 M&A 방어책과 관련해 정부 차원의 논의가 거의 없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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