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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제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우리 역사에서 내치, 외교,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가장 번성했던 시기를 들라면 누구나 조선조 세종 시대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세종이 재위 32년 동안 찬연한 치속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뛰어난 능력에 기인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기간이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시기였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물론 그 같은 안정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의 탁월한 통치능력의 결과다. 그러나 건국 초기의 그 피비린내 나는 쿠데타와 혈육간에 벌인 정치권력의 암투를 감안하면 세종 시대의 태평성대는 기적에 가깝다.
하지만 역사에 기적은 없다. 부왕 태종의 선택으로 두형(양령, 효령)을 제치고 왕위에 오른 세종은 왕좌에 앉자마자 인간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가장 쓰라린 고뇌를 맛본다. 이른바 수강궁 금군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것은 병적일 만큼 인척의 발호를 경계한 태종의 의도적 사건이기도 했다.
세종에게 왕위를 양위했으나 병권만은 거머쥔 채 물러나 있던 태종은 그가 기거하는 수강궁의 호위군사를 자신의 승인 없이 편성했다하여 법조참판 강상인, 도총제 심정 등을 역모로 몰아 죽였다. 심정은 세종비 소헌왕후의 숙부다.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명에 사은사로 간 영의정 심온마저 이 사건에 연루시켜 귀국길 압록강에서 압송, 모진 국문 끝에 귀양을 보냈다가 자진케 했다. 심온은 바로 세종의 장인이며, 소헌왕후의 친정아버지다.
불행히도 심온이 명으로 떠나던 날 그를 전송하는 고관대작의 수레가 광화문 육조거리에서 홍제원 고개마루까지 줄을 이은 것이 화근이었다. 태종이 이를 고운 눈으로 보지 않은 것은 두동생(방석, 방간)을 제거하고 처족을 몰아낸 그의 전력으로 미루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세종 시대의 정치적 안정은 비록 타의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살을 도려내는 그런 아픔을 거름으로 하여 싹텄다.
최근 우리 주변에는 실력자의 인척이기 때문에 공직에서 물러났거나 제외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실력자의 친·인척임을 기화로 갖은 불법과 비리를 자행한 사건이 연일 대서특필되고 있다. 수신제가는 어느 시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지켜야 할 우리의 소중한 덕목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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