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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알 빗발치는 사선 남북 외교관 동반 탈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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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현실. 1991년 1월 소말리아 대사였던 강신성(69)씨가 겪은 3박4일간의 극적인 체험이 꼭 그랬다.

당시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에선 정부군과 반군 사이의 내전이 한창이었다. 1월 9일 정부의 철수 지시에 따라 공항으로 갔던 강씨는 대합실에서 김용수 대사 등 북한 대사관 직원들과 마주쳤다. 내전을 틈탄 무장강도들의 잇딴 침입에 견디다 못해 그들도 공관을 버리고 무작정 공항으로 온 터였다.

"생사의 위기에 처했는데 남북한이 따로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함께 힘을 합쳐 탈출하자'고 제안했지요."

잠시 머뭇거리던 북한 대사도 고개를 끄덕였다고 했다. 그러나 관제탑의 착오로 비행기를 놓치게 됐고, 남북한 대사관 직원 및 가족 일행 21명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한국 대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뜬눈으로 밤을 지샌 뒤 다음날 아침 평소 친분이 있던 이탈리아 대사를 찾아갔습니다. 탈출을 도와달라고 통사정했죠. 북한과 수교를 맺지 않아 곤란하다며 '비행기를 내줄테니 한국 쪽 직원들만 가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우리끼리는 절대 못 간다'고 버텼습니다."

진심이 통했는지 이탈리아 대사는 본국과 통화하더니 북한 쪽 직원들도 함께 출국할 수 있게 비행기 두 대를 지원하겠다고 했다. 강씨는 곧장 남북한 직원들을 모두 데리고 이탈리아 대사관으로 향했다. 빗발치는 총알을 뚫고 가다 차를 운전하던 북한 통신기사가 가슴에 총을 맞았다.

그는 총상을 입은 후에도 차를 계속 몰아 일행을 안전하게 이탈리아 대사관에 도착시킨 뒤 숨을 거뒀다. 거기서 이틀밤을 함께 더 지내고 남북한 대사관 직원들은 이탈리아 군용기 편으로 12일 케냐의 몸바사 공항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이 사연은 91년 1월 24일자 중앙일보 1, 3면에 단독으로 보도돼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유럽공동체(EC)대표부 공사로, 칠레 대사로 부임지를 옮겨다니면서도 강씨의 기억 한 켠엔 늘 '소말리아'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 기억을 끄집어내 퇴직 후 5년여에 걸쳐 한 줄 한 줄 써내려갔다. 그렇게 탄생한 250쪽 분량의 장편소설 '탈출'로 그는 최근 문예월간지 '문학공간'의 추천을 받아 등단했다. 심사를 맡았던 소설가 김태호씨는 이 작품에 대해 "국가와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인간애가 잘 표현됐다"고 평했다.

"헤어질 때 북쪽 사람들과 서로 부둥켜안고 '꼭 다시 만나자'며 약속했는데 지금껏 소식도 모르고 살았어요. 죽기 전에 재회의 기쁨을 누리는 게 남은 소원입니다."

글=신예리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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