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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맛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65호 34면

[ESSAY] 서현의 상상력사전: 정신분석 

끔찍한 날이 또 왔군. 우리가 굶주림에 떨어야 하는 날. 12월 31일. 하필이면 겨울이라서 심지어 추운 날.

음식 먹은 다음 화장실에서 찌꺼기 배출하지? 머릿속도 마찬가지야. 상상, 궁리, 계산하고 남은 찌꺼기가 꿈이야. 자면서 꾸는 그 꿈 말이야. 변비로 찌꺼기 배출 못 하면 몸 여기저기 이상 생기잖아. 꿈도 배출, 청소 않으면 머릿속이 쓰레기통 돼. 우리가 그걸 깨끗하게 없애준다고, 먹어서. 절대 기생이 아니야, 공생이라고. 낮은 너희의 것, 밤은 우리의 것.

밤은 우리가 일용할 양식이 익기 시작하는 시간이지. 우리는 안개처럼 슬슬 사람들 머릿속에 들어가서 몽글몽글 분비되는 꿈을 먹어. 꿈도 맛이 다양해. 달고 시고 떫고 고소해. 꿈이 맛있으면 당연히 깔끔히 먹어치우지. 그럼 사람들의 아침이 개운해져. 맛없으면 이곳저곳 베물다가 그냥 나와. 일어났을 때 꿈이 기억나면 그건 우리가 먹다가 남긴 거야. 여기저기 파먹었으니 내용은 뒤죽박죽이고 청소가 될 되었으니 머릿속은 뒤숭숭하지.

우리가 한참 꿈을 먹고 있는데 사람들이 깰 때가 있어. 아주 당황스럽지. 우리는 먹던 걸 마저 먹어야 하니 놓지 않겠다고 버틴다고. 그럼 사람은 깬 건지 안 깬 건지 모르는 상태에서 또 발버둥을 치고. 가끔 소리 지르면서 깨는 경우도 있어. 가위 눌렸다고 하는 거지.

대개 애들 꿈이 말랑말랑하고 맛있어. 세상에 처음 보는 신기한 것 투성이여서 그런지 맛도 다양해. 나이 먹으면 꿈도 다 비슷비슷하게 질겨져. 뻔한 생각 하게 되니까 그런 모양이야. 이런 꿈은 식사가 아니라 끼니라고 쳐야 해. 먹는 게 아니고 때우는 것. 그런데 요즘 애늙은이들이 늘어가나 봐. 분명 애들 꿈인데 먹어보면 단체주문 도시락 맛이야. 텁텁, 푸석, 밋밋. 속상하지. 인생삼락 중 최고락이 식도락인데 이게 도시락이라니.

어른들 꿈에서도 우리가 좋아하는 게 있지. 야한 꿈. 이런 꿈 만나면 의식이 혼미해져. 어휴, 생각만 해도 벌써 짜릿하네. 이런 꿈은 찌꺼기 한 톨 없이 말끔하게 먹어치우지. 그랬더니 웬 이상한 의사가 이걸 어렴풋이 눈치챈 거야. 왜 야한 꿈은 기억이 잘 안 나거나 작은 조각만 남느냐고. 맹랑한 의사인 거지. 정신분석학이란 수상한 학문이 생긴 거고. 꿈의 해석, 억압, 무의식, 리비도, 이런 거 하나도 믿지 말라고.

진짜 문제는 사람들이 점점 잠을 안 자는 거야. 옛날에는 해 지면 잤잖아. 그런데 전깃불이 켜지면서 사람들 잠이 엄청 줄었어. 새벽에야 자기 시작하는 사람도 있어. 당연히 꿈을 안 꾸지. 그럼 우리는 그동안 쫄쫄 굶고 기다려야 한다고. 세상에서 제일 슬픈 게 배 고픈 건데, 이걸 매일 당해 봐. 우리에게는 전구 발명한 아저씨가 역사상 최대 원수야. 야간작업, 철야집회, 밤샘토론. 다 우리 가슴을 철렁하게 하는 단어들이야.

우리도 생존전략을 짜야지. 바로 술이야. 우리야 원래 안개처럼 돌아다니니까 술병, 술통에 들어가는 건 일도 아니지. 우리가 들어가면 술 도수가 낮아져. 요즘 소주가 맹물이라고 불평하는 사람들 많지? 덕분에 사람들이 소주를 마시는 게 아니고 들이붓기 시작했어. 심지어 맥주도 밍밍하다고 소주를 붓지. 효과가 바로 나타나. 어디서나 자는 거지. 지하철, 택시, 벤치. 장소를 가리지 않아.

그런데 술 먹은 꿈은 머리에 끈끈하게 붙어있어서 잘 안 떨어져. 우리가 그런 꿈을 뜯어먹고 나면 다음날 아침 꿈꾼 사람 머리가 아파지게 돼. 미안하지만 어쩔 수가 없지. 심하게 끈적이는 걸 열심히 뜯다 보면 멀쩡한 기억까지 딸려오게 돼. 그러면 다음날 기억이 하나도 안 나지. 필름이 끊겼다고 하는 거야. 뉴스에 끌려 나와서 어제 술 먹고 한 짓이라 기억 안 난다는 사람들 있지? 원래 머릿속에 숙변 같은 찐득한 찌꺼기가 가득했던 거야.

12월 31일. 모두 밤거리를 쏘다니거나 텔레비전 켜 놓고 필사적으로 안 자는 밤. 어디 있는지 알지도 못하던 보신각에서 종은 왜 치고, 방송사마다 짜고치는 시상식들은 도대체 왜 들여다보고 있는 거야? 살 빼고 담배 끊는 결심을 굳이 그렇게 밤샌 다음 아침에 하고는 작심삼일이라고 자책해? 그냥 생각났을 때 시작하고 밤 되면 자라구. 지구는 덜컥덜컥이 아니고 딩굴딩굴 굴러가는데 거기에 눈금 매기면 뭐해. 1월 1일이 아니고 매일이 새로와야지.

서현 : 한양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본업인 건축 외에 글도 가끔 쓴다. 건축에 관한 글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뒤집는 건축적 글쓰기방식에 더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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