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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있어야 할 곳은 세상 한가운데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65호 29면

삶과 믿음

며칠 전 수능시험을 마친 고3 수험생들과 뜻깊은 시간을 보내고 왔다. 동해 낙산사와 서해 전등사에서 함께한 ‘산사청춘캠프’에서다. 해수관세음보살상 앞에서 붉게 솟는 해를 보며 환호하는 청춘들! 그들에게서 난 희망을 보았다.

600년 된 전등사 은행나무 사이로 서해의 낙조를 보면서 내 시간의 흐름도 재 보았다. 이렇듯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한 시간은 그들에게도 내게도 ‘다가올 것’과 ‘지나간 것’에 대한 ‘사유와 참회의 시간’이었다.

솔직히 평소 거리에서 만나는 고등학생들은 어딘가 위험해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 절에서 만난 아이들은 참 맑고 착했다. 절이라는 특수 환경 때문인지, 어쨌든 희망을 향해 활짝 날개를 펴는 청춘들의 모습은 일출과 일몰의 붉음보다도 더 환하게 빛났다.

간혹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인지, 재수를 결정하기 위한 고민인지, 어두운 얼굴이 조금씩 드러나기도 했다. 바닷바람에 묻어 버리고 싶은 듯, 긴 한숨을 내뱉는 청년들도 있었다. 지난 1년이 또는 2년이 얼마나 치열했을지 짐작이 갔다.

“동해바다 용이 나타나서 떨어지는 의상대사를 받아 줬다고 하잖아. 그 용을 생각해 봐.” 그랬더니 옆 친구가 대뜸 대답했다. “재수해-용!” 크크크. 우린 함께 웃으며 그 대답을 넉살 좋게 비난했다. 특히 재수생들은 “안 돼! 삼수하란 말이냐!”며 난리를 쳤다. 하지만, 그땐 몰랐다. 정작 본인이 재수를 고민하게 될 줄은.

어딘가 그늘져 보이는 한 아이에게는 “왜? 시험 망쳤어?” 했더니, 아니란다. 돌아온 대답은 뜻밖에도 “부모님과 말하기가 싫어요. 내 인생을 사는 건지, 부모님 인생을 사는 건지 모르겠어요”였다. “당당하게 살아. 네 인생의 주인은 너니까. 부모님도 걱정돼서 그러실 거야.”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이럴 땐 대답 찾기가 어렵다. 부모님의 마음도, 아이의 마음도 알기 때문이다.

넘실대는 파도 위로 기러기가 울며 지나갔다. 메리 올리버의 시 ‘기러기’가 생각났다. ‘착해지지 않아도 돼/ 무릎으로 기어 다니지 않아도 돼/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너는 상상하는 대로 세계를 볼 수 있어/ 기러기들, 너를 소리쳐 부르잖아, 달뜬 목소리로/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이 세상 모든 것들/ 그 한가운데라고’.

홍련암 관세음보살님 아래로 바위를 끌어안듯 연이어 파도가 몰아쳤다. 파도도 갈매기도 뭔가 말하는 것 같았다. ‘착해지지 않아도 돼’ 라는 걸까? 앗, 이건 내가 듣고 싶은 말이지. 아마도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이 세상 모든 것들, 그 한가운데라고’ 말했을 것이다. 파도처럼 기러기처럼 나도 외쳐 본다. ‘힘들었던 시간일랑 바다에 다 던져 버리고, 앞으론 저 푸른 바다처럼 세상을 다 품으며 살아 봐. 인제 그만 너 자신도, 세상도 용서해 주고! 다 괜찮아질 거야’.

원영 스님
조계종에서 불교연구·교육을 담당하는 교육아사리. 저서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인 것들』. BBS 라디오 ‘좋은 아침, 원영입니다’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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